남궁세가의 아이들은 걸음마와 함께 하늘을 보고 그 뜻을 배운다. 검을 잡기 전, 우리가 둔 하늘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인지를 먼저 헤아리는 것이다. 창천남궁세가의 직계로 한날한시에 난 두 아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제에게는 이름 붙여지기 전부터 준비된 검이 있었고 기꺼이 손을 뻗어 그 길을 가기를 택했다. 앞으로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결코 고개를 꺾지 않겠다고. 드넓은 하늘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검수가 되겠다고.
어떤 뜻을 가지고 세상에 왔든간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게 태어난다. 훗날 가문의 이름을 드높이게 되는 남궁쌍검이라 한들 다르지 않았다. 손도 발도 작아 잔뜩 힘을 주어야 검을 제대로 잡을 수 있던 충년 무렵. 자신보다 더 작은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까지 남궁신의 세상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 둘로 나뉘어졌다. 배가 고프면 먹고, 눈이 감기면 잠든다. 눈을 뜨면 글을 읽고 몸을 움직인다. 검을 배우는 것은 즐겁다. 이기는 건 더 좋다. 시시할 정도로 단순한 머릿속에는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아직은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을 무렵. 훗날 공천검이라 불릴 아이에게는 내가 아닌 것은 나를 움직일 수 없다는 다소 오만방자한 사고방식이 깃들어 있었다.
사건은 춘분을 지나 청명으로 접어들 시기의 봄날에 벌어졌다. 그때쯤 안휘에는 황산에서 들짐승이 내려와 논밭을 어지럽힌다는 소문이 돌았다. 인명에 피해를 입힐 정도는 아니었지만 갖은 애를 써서 길러놓은 농작물들을 망친다는 것만으로 골칫거리였다. 고민 끝에 사람들은 작물을 지킬 개를 몇 마리 들였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개를 묶어두게 되니, 자연스럽게 남궁세가로도 한 마리가 흘러들어왔다.
“봤어?”
처음 개를 발견한 건 백이었다. 경전을 읽고 있던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듣고 있는 거야?”
“…….”
“너 일부러 대답 안 하는 거지.”
그제서야 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왜냐하면 ‘일부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백이 약간 어이없어하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면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필요없어.”
“뭐가 필요 없는데?”
“아니까.”
“뭘 안단 거야. 너는 봤어?”
백은 아이답지 않게 미간을 잔뜩 구겼다. 늘 이런 식이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설명해두자면, 백도 결코 수다스러운 아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른들이 너무 얌전해 걱정할 정도로 과묵한 편이었다. 하지만 백과 한날한시에 태어나 일상을 늘 함께 해온 ‘다른 쪽’은 해도해도 너무했다. 남궁신은 입을 열어 시시콜콜한 대하를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하는 말이라곤 ‘그래’ 혹은 ‘아니’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마저도 입밖으로 내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덕분에 백은 암호처럼 조각조각 흩어진 형제의 대답들을 그러모아 의중을 추리해야 했다.
“봤냐니까. 마당에 커다란 개가 있어.”
하지만 추리가 언제나 맞아떨어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번거롭고 답답했다. 백은 머릿속에서 보이지 않는 형제와 싸우는 대신 재촉하기를 택했다. 내내 대답이 없던 형제는 마침내 읽고 있던 경전의 마지막 장을 넘기더니 책을 폭 소리 나게 덮었다. 오늘 치 글공부가 끝난 것이다.
“못 봤어.”
“몸집이 나보다 커.”
“나보다는?”
“넌 나랑 키가 같잖아.”
“내가 좀 더 커.”
“아니야. 저번에 재 봤을 때 같았어.”
“그때보다 컸어.”
“그럼 이따 다시 재.”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는 한창 클 때니까. 몇 주가 흐른 지금은 신이 조금 더 컸을지도 모른다. 백은 신이 컸다면 그만큼 자신도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신이 덮은 책을 서가에 다시 꽂아두는 동안 백은 말을 이어갔다.
“털이 검은색이야.”
“눈은?”
“눈도 검정색.”
“아버지만큼 커?”
“아버지보다는 작아.”
“어머니보다 커?”
백은 질문을 듣고 잠시 생각했다.
“그럴지도 몰라.”
상상력이란 무궁무진한 법이라 아주 잠깐 보았던 짐승의 모습은 어느새 집채만한 영물이 되어 머릿속에 남았다. 신은 그 말을 듣더니 대뜸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이 고개를 기웃대며 그 뒤를 따랐다.
“어디 가.”
“다 끝났어.”
“글공부 다 끝난 건 알아.”
“볼 거야.”
“같이 가.”
남궁백도 마침 개를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윤기가 흐르는 털에 거친 숨을 내뱉는 맹견은 어린아이의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지만 동시에 마음을 끄는 데가 있었다. 형제와 함께라면 더욱 두려울 게 없을 것이다. 그들은 총총총 걸어 마루를 지나 신발을 신고 별관 입구까지 나아갔다. 길을 아는 건 백이었는데 앞서 걷는 건 어째선지 신이었다. 영특한 아백은 곧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어디 있는지 알아?”
“아니.”
“그런데 왜 먼저 가.”
“네가 아니까.”
“그럼 내가 앞서야지.”
그 말에 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신의 발이 멈춘 사이 백은 쌍둥이 동생을 따라잡았고 마침내 제대로 앞장설 수 있게 되었다. 신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거면 됐다. 비교대상이 범접할 수 없어서 그렇지 백 역시 단순하기 그지없는 아이였다.
“따라와.”
백은 의젓하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제대로 들은 건진 모르겠지만 신은 그 뒤를 따라오긴 했다. 곧 두 아이는 별관 마당에 다다랐다. 잘 가꿔진 정원이 내다보이는 마당에 낯선 것은 딱 하나였다. 백이 말했던 것처럼, 고목에 개 한 마리가 묶여 있었다. 신은 개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크다.”
개는 정말 컸다. 일단 신과 백보다는 훨씬 컸다.
“커.”
백도 동의했다. 다시 봐도 어머니보다 큰 것 같았다.
“이빨도 커?”
신이 물었다. 백은 맹견의 이를 본 적이 없었지만 추측할 수는 있었다.
“이빨도 클 것 같아.”
“안 보여.”
“몸도 크고 눈도 크고 귀도 크잖아.”
백의 말에 신은 나름대로 설득된 것 같았다. 신은 고개를 조금 끄덕이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그 동작에 백이 움찔하며 신의 팔을 잡았다.
“잠깐…”
“왜.”
“사납다고 했어. 가까이 가지 말래.”
“누가?”
“유모가.”
신은 수긍하는 듯 잠시 멈췄다가 다시 발을 옮겼다. 팔을 잡은 백의 몸도 살짝 움직였다. 백이 한 번 더 말했다.
“왜 또 가.”
“가까이 안 갈 거야.”
“가고 있잖아.”
“멈출 거야.”
그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가까이 가지 말라고 한 건 분명 함부로 만지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까 만질 정도의 거리가 아니라면 조금은 더 다가가도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백도 맹견의 얼굴을 조금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그래서 두 아이는 한발한발 개에게 가까워졌다. 개의 목줄은 여전히 나무에 단단하게 묶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으르르…… ”
“!”
“컹!”
묶여 있던 맹견이 갑자기 이빨을 드러냈다. ‘크다.’ 두 아이는 동시에 생각했다. 과연 몸도 크고 눈도 크고 귀도 큰 개다웠다. 문제는 다음 순간에 발생했다. 큰 소리로 짖은 개가 몸을 이리저리 비틀더니, 거추장스럽다는 듯이 목을 휙 숙인 것이다. 그러자 단단히 묶여 있다고 생각했던 목줄이 거짓말처럼 풀려버렸다. 큰일이다! 백은 자기도 모르게 옆에 있던 신의 손을 잡았다.
“도망가야 돼.”
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형제의 손을 꽉 붙들고 달렸다.
이렇게 커다란 개를 처음 본 아이들은 몰랐다. 개를 마주했을 때는 마음을 침착하게 하고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등을 보이고 달리는 건 맹견을 자극할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목줄이 풀린 개는 잔뜩 흥분해 두 아이를 맹렬하게 쫓아왔다. 신과 백은 정원을 가로질러 미친듯이 달렸다. 유난히 한적해 누구도 진로를 방해하지 않았단 것은 다행이었으나, 그들을 도와줄 만한 어른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불행이었다. 때마침 비무대회 준비로 대부분의 무인들이 본관 연무장에 모인 탓에 별관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은 아직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오직 꽉 잡은 두 손만이 서로의 동앗줄이었다.
‘숨 차…!’
대화를 나눌 틈도 없었다. 언제까지나 달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결착을 내야 했다. 그 때, 정신없이 달리던 백의 발목이 꺾였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아이가 한바퀴를 굴렀다. 단단히 잡혀 있던 손은 어느샌가 풀려버렸다. 신이 놓은 것이다. 계속 잡고 있으면 둘 다 넘어질 테니까. 합리적인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백의 마음엔 순간 억울한 감정이 차올랐다. 혼자 도망치는 거야? 당연히 그렇겠지. 둘 다 다치는 것보다야 신 혼자라도 도망가서 어른들을 불러오는 쪽이 낫다. 잠깐만 버티면 분명 신이 어른들을 데려와 줄 것이다. 잠깐만 버티면…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든 백의 시야에 생각지도 못한 모습이 들어왔다.
“너…”
신이었다. 신이 어느샌가 자신의 앞에 서서 맹견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등지고 선 탓에 얼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백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왜 멈췄어?”
어른들을 부르러 갔어야지! 그게 옳은 방법이다. 신은 누구도 잡을 수 없을 만큼 몸놀림이 빠르니까, 이대로 뛰어갔다면 분명 본관까지 당도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신은 멈춰 서서 이곳에 남기를 택했다. 평소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텐데. 그 혼란스러운 순간에 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네가 멈췄잖아.”
어린 남궁신의 세상은 두 개로 나뉘어진다. 나, 그리고 내가 아닌 것. 내가 아닌 것은 그게 무엇이라도 나를 움직일 수 없다.
“넌 나니까.”
반대로 나라면.
네가 나라면, 너는 나를 멈출 수 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나는 나라고 말할 새도 없이 상황이 급변했다. 남궁신이 바닥에 있는 돌을 주워 맹견의 오른쪽으로 던졌다. 맞추려는 게 아니라 주의를 끌려는 목적인 게 분명했다. 개의 시선이 아주 잠깐동안 옆으로 움직였다. 때맞춰 신이 백의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이 마주쳤을 때, 백은 드디어 신의 말을 아주 약간 이해할 수 있었다. 너는 나고, 나는 너라서.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는 그 말을. 시선이 맞닿은 순간 신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는데도 머릿속에 잘 아는 목소리가 울렸다.
‘뛰어!’
그래서 두 아이는 다시 미친듯이 뛰었다. 발목이 불편한 백의 몫까지 신이 잡고 달려주었다.
그 날의 소동은 본관에 도착한 아이들이 한 무리의 무인을 만나면서 종결되었다. 개의 줄이 풀린 걸 본 어른들은 깜짝 놀라며 부드럽게 맹견을 제압해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백은 발목이 조금 꺾였지만, 조금 삔 것 뿐이라 금방 회복할 수 있었다. 두 남궁 도련님의 용맹함은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렇게 큰 개를, 아이 몸집보다도 큰 개를 맞닥뜨렸는데도 무서워하지 않았다고. 울거나 떨지도 않고 씩씩하게 맞서서 버텨냈다고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정리되자 두 도련님에게는 상이 주어졌다. 접시 위에 올라온 금빛 간식이었다. 달걀 노른자 네 개에 물 두 잔을 넣어 잘 섞고, 또 설탕을 두 줌 넣어 섞고, 다 섞이면 전분 한 줌을 넣어 멍울이 지지 않도록 잘 섞은 다음 체에 걸러 달군 냄비에서 돼지기름을 넣어가며 빠르게 저으면 완성되는 요리. 그릇에도 붙지 않고, 젓가락에도 붙지 않고, 이에도 붙지 않아 그 이름은 삼부점.
수련을 잘 마치면 달에 세 번 정도 주어지는 간식이 두 어린 무인의 용맹을 치하하며 주어졌다. 무엇보다도 이건 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어느새 말끔해진 두 아이는 찻주전자를 가운데에 둔 채 마주보고 앉았다. 신은 언제나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젓가락질이 평소보다 훨씬 빨랐다. 문득 백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
자기 몫의 삼부점을 신에게 밀어주었다.
“?”
신이 눈을 깜빡였다. 형제에게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의문 어린 표정이었다. 백은 가타부타 설명하는 대신 짧게 말했다.
“너 먹어.”
“응.”
그리고 신은 당연하게도 사양하지 않았다.
* * *
춘분을 지나 청명으로 접어들 무렵의 봄날. 구산은 아주 오랜만에 안휘에 방문했다. 요사이 중원은 흉흉하여 마음 놓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적과의 접전이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든 지금에서야 겨우 이곳에 방문할 짬이 생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파를 뚫고 구산이 이곳에 온 단 하나의 목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구산.”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고정한 남궁휘가 고개를 까딱이며 그를 맞았다. 구산은 채신머리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오랜만이야.”
“그래. 이렇게 얼굴을 본지도 오래됐군.”
“그간… 어려운 일은 없었고?”
“별 일 없었어. 무사해. 너는.”
“이쪽도 마찬가지지.”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인파 사이에 끼었다. 안도를 숨기지 않는 사람들의 소음은 둘 모두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늘 이렇게 평화롭다면 좋을 텐데. 그러나 그 생각이 무색하게, 바로 직후 사건이 터졌다.
“죄송합니다, 아이고, 이 녀석! 멋대로 뛰쳐나가면 안 된다니까!”
작은 개 한 마리가 주인의 품에서 뛰쳐나와 달려든 것이다. 그것도 하필… 구산에게로. 구산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것 같은 강아지가 헥헥거리며 구산의 발 위로 올라와 재롱을 부리기 시작했다. 달려온 주인은 그 모습을 보더니 막을 생각은 까맣게 잊고 “아이고, 아이고. 잔망스러운 녀석.” 만 연발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귀여운 강아지를 누가 꺼린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봐.”
막아선 건 남궁휘였다. 그는 썩 부드러운 투로 주인을 불러 말했다. “위험하니 데리고 가는 게 좋겠는데.” 그 말에 주인도 정신을 차렸다. “아, 아이고. 물론이지요. 내 정신 좀 봐. 이러다 길을 잃으면 어쩌려고 이러냐.” 그는 구산의 발 위에서 뒹굴던 강아지를 번쩍 들어 올려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야 구산은 겨우 긴장을 풀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휘가 살짝 몸을 숙이며 물었다.
“아직도 개를 무서워하나.”
“무서운 게 아니라…… 꺼리는 거야. 예전보단 많이 나아졌지.”
“내가 신경을 못 썼군. 앞으로는 좀 더 꼼꼼히 살피지.”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괜찮아.”
“정말 괜찮은 건가.”
“그래, 정말이야. 이 나이가 되어서 저렇게 조그만 녀석에게 겁을 집어먹어서야…… 내 면이 안 서지 않겠어.”
구산이 부드러운 투로 농담했다. 그 말엔 남궁휘도 제법 설득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불행은 한 번만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저 멀리에서 수상하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유를 파악하기도 전에 원인이 점점 가까워졌다. 커다란 개였다! 검은 털에, 눈도 검은색인 맹견이 시장 한복판에 난입해 달리고 있었다. 순간 구산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순식간에 갈라진 사람들 속에서 구산만 얼어붙어 자리를 피하지 못하고 개의 앞길을 정확히 가로막았다.
이대로라면 분명 부딪힌다!
어찌할 수도 없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그 시점. 이번에는 남궁휘의 손이 인파 속에서 튀어나와 구산의 팔을 단단히 붙들었다. 그리고는 재빠르게 당겨, 개의 진로에서 그를 구해냈다. 굳어 있던 구산이 당도한 곳은… 남궁휘의 품 속이었다.
“…….”
무시무시한 맹견과 부딪힐 것인가. 손을 잡기도 조심스러운 연인의 품에 안길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면 구산은 분명 시간 제한이 다할 때까지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고 우물쭈물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택하는 쪽이 구산이 아니라 남궁휘였기에 그는 어찌할 틈도 없이 후자로 밀려가고 말았다. 남궁휘의 옷은 잘 다려 빳빳했고 품에서는 미미하게 편백나무 향이 났다. 길고 결 좋은 머리칼이 구산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굴은 점점 달아올라 이제는 고개를 들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윽고 남궁휘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갔어. 주인이 와서 개를 데려갔다.”
“……아, 그, 어, 다, 다행이네…….”
“너는 무사한가.”
“…….”
무사하냐고 묻는다면, 일단 무사하긴 한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산이 대답하지 않자 남궁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듯 팔에 힘을 풀고 떨어졌다.
“미안하군. 급해서 나도 모르게 한 일이야.”
“뭐,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네가 이런 일을 불편해한다는 사실을 잊었다. 저번에도 실수했는데.”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어쩔 수 없었으니 한 번만 이해해 줘. 다음부터는 닿지 않게 특별히 조심하지.”
“아니, 아니야. 아니라니까! 내 말 좀 들어…!”
구산이 오랜만에 언성을 높이자 남궁휘는 잠시 놀란 듯 멈추었다.
‘젠장. 이렇게 크게 말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었다. 여기서 어물어물 말했다간 이전에 쌓인 오해가 점점 커져만 갈 것이다. 구산은 한 번 심호흡을 하고, 팔을 뻗어서 다시 남궁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끌어당겨 몸을 가까이 했다. 남은 팔은 자연스럽게 팔 사이로 들어가 등을 껴안았고, 고개는 가볍게 기울어져 어깨에 기댔다.
“…….”
“너와 이렇게 있는 건…… 싫지 않아.”
“싫어하지 않는다고?”
“그래.”
“싫어했었잖아. 토할 정도로.”
“……그건 그 때 얘기고……! 지금은 아니야.”
믿지 못하겠단 말이 반복되기 전에 구산은 다시 한 번 힘을 주어 그를 당겨 안았다. 전생의 인연. 오랫동안 홀로 흠모해 온 사내를. 이제는 정인이라 부를 수 있는 남궁휘를.
“……좋으니까.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가. 이젠 괜찮은 건가.”
남궁휘는 비로소 납득했다는 투로 말했다. 그리고 짧게 구산의 등을 쓸었다.
“다행이군.”
표정은 보지 못했지만 등 너머로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묘하게 안심되면서도 진정되지 않는 기분에 구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고 있으려니 옛날 생각이 났다. 아주 오래 전. 50년은 족히 넘은 옛날 일 말이다. 꼭 오늘처럼 검고 커다란 개가 우리를 쫓아왔을 때의 기억. 혀 끝을 스치던 삼부점의 달콤한 맛. 그 옛날의 일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완벽히 우리인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형언할 수 없는 기분 탓인지 아니면 아직 편백나무 향이 가시지 않은 탓인지. 구산은 약한 어지럼증을 느끼며 겨우 웃었다. 어느 쪽이든, 결코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