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박스 ~화해를 불러오는 마법~
S/S 그린하우스 에디션

w.마리

5월은 정말이지 활기찬 달이었다—아니, 솔직히 말해 조금 과할 정도로. 햇살은 쓸데없이 성실했고 바람은 괜히 들떠 있었으며 사람들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고 싶어 했다. 계절이 바뀌려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다들 벌써 여름이 온 것처럼 굴고 있다. 그 결과, 사소한 일조차 조용히 지나가는 법이 없었다.

대개 이런 달에는 평소라면 고개 한 번 끄덕이고 넘어갔을 문제들이 실패한 팬케이크마냥 괴랄하게 부풀어 오르기 마련이다. 그냥 참고 넘어갔을 말들이 거슬린다거나, 늘 보던 표정이 꼴보기 싫어지거나. 그러다보면 자주 일어나지 않는 이벤트도 생기는 법이다.

이를테면 나이를 먹을만큼 먹은 특별반 담당 교사 둘이서 교무실 한복판에서 언성을 높이는 일같은 것이.

목적 없는 아침에만 깃드는 고요한 정적은 오래 유지되지는 못했다. 의자를 끄는 소리와 함께 어른스럽지 못한 말들이 쏟아져 나오자, 교무실 앞에 서있던 보와 이벨린은 난감한 표정으로 시선만 마주칠 뿐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했다.

―네가 말려봐.
―내가? 농담도.

이벨린이 입을 벙긋거리자 보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택도 없을걸!

그러는 사이 안에서 우당탕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죽이던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고개만 살짝 내밀었다. 보의 정수리에 턱을 올려둔 이벨린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진이 디에고 선생님을 때린 건 아니겠지? 그 말에 보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종잇장 같은 인간이 때려봤자 얼마나 아프다고. 서로를 향해 서있던 진과 디에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번개가 몇 번쯤 오간 것 같았다.

흔하지 않다고 해도 말이 안 되는 광경은 아니었다. 진과 디에고는 파트너 사이인 것이 신기할 정도로 성향부터 성격까지 정 반대였고 임무나 수업이 아니면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도 드물었다. 많은 학생들이 알다시피 대부분 다소 온건한 디에고 쪽에서 숙이고 들어가는 편이었는데, 보의 생각으로는 디에고 라미레스 또한 사람을 열받게 하는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자신은 한참 어린데다 그에게 많은 걸 배우고 있는 입장이다보니 체감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참아준다’는 듯한 태도가 동등한 위치의 상대에겐 제법 얄미워보일 거라고 보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다 내 잘못이라 이거잖아? 아아악!!! 짜증나!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니야.

자신이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일부 먹고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흥분한 진을 응시하던 디에고는 지친 기색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의도가 어떻든 간에 그 비언어적 행동은 불난 저택에 기름을 붓는 것과 다름 없었고,  진은 까무잡잡한 얼굴이 거의 새까매질정도로 고함을 질렀다. 지금 그게 대화하자는 사람 태도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왜 말을 안하는데! 멀쩡한 얼굴로 사람 병신 만들고, 넌 예전부터 그랬었지! 일반반 수업시간이라 다른 교사들과 학생들이 주변에 없었기 때문인지 디에고는 진이 쏟아내는 폭언을 중간에 끊어내지 않았다. 혹은 체면을 차릴 새도 없이 마찬가지로 화가 났던지. 언어로 된 폭력에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하던 디에고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일단 진정하고. 화나면 소리지르는 버릇이나 고쳐, 진. 너도 명색이 교산데 언제까지 그럴거야.
―난 보조교사야!!!!!!!!!!!!!

보는 거기서 참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릴뻔 했는데, 이벨린은 들키지 않으려 보의 입에 거의 손을 쑤셔넣어야 했다. 쉬이이잇! 데시벨 높은 목소리는 교무실 밖까지 들릴 정도로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나한테까지 선생질하지 말라고 했지 이 샌님새끼야!!! 갈거야! 수업은 네 알아서 해!


신경질적인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보와 이벨린은 후다닥 옆 교실 문 뒤로 몸을 숨겼다. 방학까지 한 달 남짓 남아 느슨한 학교 일상에 긴장감을 주는 대단한 선생들이었다. 며칠 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가며 이벨린과 싸워대다가 나란히 반성문을 제출해야 했던 보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과연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우리 일요일에 피크닉 하기로 한 거 말이야.
그 뒤로 이벨린이 냉큼 따라붙으며 말했다. 걱정이 가득한 눈썹이 눈에 띄게 쳐졌다.
―어떡하지? 가지 말자고 하시면.
―간단하네. 가지말자. 나 스터디 학기말 레포트도 써야하고, 실습 보고서도 정리해야 해서 바빠.

 보가 머리 뒤로 깍지를 낀 채 태평하게 걸었다. 그 배은망덕한 언사에 입을 떡 벌린 이벨린은 한걸음에 날아와 동생의 뒷통수를 후려쳤다. 익숙한 타격음과 함께 보가 소리를 쳤다.

―자꾸 무식하게 힘 자랑할래?!
―너어. 누나한테 무식하게라고 했겠다?


손이 번쩍 들어올려지자 보가 먼저 선수쳤다. 사실은 정말 가고 싶었다고 말하려고 했어. 정말로.

―그럼 화해를 우선 시켜야 할 것 같은데!
―뭐 어떻게 하게.
―으음, 일단 서로 대화를 하게 하고…
―다 큰 어른들이 그걸로 화해할 거였으면 싸우지도 않았지. 그리고 새파랗게 어린 제자들이 어디 가둬놓고 ‘손 잡으세요 선생님. 서로에게 서운한 점을 얘기해봅시다.’ 라고 해봤자 하나도 안 먹힐 것 같은데. 자존심만 무지하게 상할거고.


보의 논리정연한 반박에 이벨린이 끙 소리를 내며 고민에 잠겼다. 대충 맞장구만 쳐주고 말 생각이였던 보는 이벨린의 진지한 표정에 입을 비죽 내밀었다. 원래 남의 일에 간섭하는 거 아니랬는데 팔자에도 없는 중간다리 역할이나 하게 생겼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원인을 파악하는 것부터 선행되어야 하는데 보와 이벨린 중 누구도 ‘왜 싸우셨어요?’ 라고 물어보고 싶지 않아했다.

이벨린의 경우, 두 선생님들의 체면을 배려해 직설적으로 묻는 일을 피하고자 했고 보의 경우 학생의 포지션에서 철저하게 벗어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문제는 어른들이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었고, 미성년자인 우리가 굳이 선을 넘어 개입할 필요가 없을 거라 여겼다. 물론 성인이 되고 나서도 보는 미성숙한 남동생 자아를 가지고 이벨린과 죽어라 싸워댔고 연상의 교육자들은 여전히 둘의 관계 개선에 힘써주었다…….

***

아무튼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화창한 주말의 시작, 일요일 아침부터 두 사람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말이 오기까지 진과 디에고의 사이가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다는 이벨린의 결심, 일단 피크닉이나 준비하자며 그를 만류한 보의 노력 등등 무수한 일들이 있었지만 고이 접어둔 채였다.

평소 깔끔하게 정리해두는 나무 식탁에 갖가지 식재료들이 올라왔다. 보는 약속시간인 정오까지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사흘전에 담궈둔 레몬청과 딸기청을 꺼냈다. 아이스박스에 미리 넣어둔 탄산수에 섞고 미리 썰어둔 과일 슬라이스를 올리면 제법 훌륭한 에이드가 될 예정이었다!

한편 이벨린은 두껍게 자른 브리오슈 식빵을 오븐에서 꺼냈다. 갓 구운 빵은 손끝으로 살짝 눌렀을 때 아주 천천히 원래 모양을 되찾는다. 탄력있게 식빵 형태로 되돌아온 빵의 속살까지 확인한 이벨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라낸 가장자리를 볼에 담아 보에게 넘긴 뒤 이벨린은 버터를 집어들었다. 실온에 두어 한층 부드러워진 버터는 저항없이 무딘 날에 잘렸고 그대로 빵 위에 발렸다. 두툼하게 발린 표면에선 먹음직한 냄새가 났고, 이벨린은 버터가 발리지 않은 곳은 없는지 꼼꼼히 눈대중으로 확인하며 나이프를 주저없이 움직였다.

버터 발린 브리오슈에 올라온 것은 잘 씻은 버터헤드 상추 한 잎. 잠시 고민하다가 남은 양을 확인한 이벨린은 상추를 한 잎 더 올렸다. 돌돌 말려있는 상추잎은 싱그러운 연둣빛이라 이벨린은 자신의 선택에 흡족해했다. 펼쳐올린 잎 위에 차례대로 토마토와 얇게 저민 프로슈토가 듬뿍 올라갔다. 두꺼운 햄 한 장보다, 얇은 햄 여러장이 훨씬 풍미가 살아난다는 것이 이벨린의 철학이었다. 지방이 실처럼 하얗게 얽힌 프로슈토를 손 끝으로 한 번, 두 번. 세번까지 자연스럽게 접어 부드러운 주름을 만들자 유명 브런치집 샌드위치처럼 모양새가 그럴싸해졌다.

와장창! 한낮의 평화를 무참히 깬 소리가 부엌을 뒤흔들었다. 이벨린이 샌드위치에 다 넣지 않고 남은 프로슈토를 테이블에 올려두었는데, 보가 그 사이를 지나가다 팔꿈치로 그릇을 밀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아까운 햄들이 철퍼덕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달라붙었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바닥을 구른 그릇과 햄으로 쏠렸다.

―햄 아깝게! 네가 떨어뜨린 거야!
―아니, 그릇을 너무 끝에 둔 네 잘못이지.

뭐야? 두 사람의 눈매가 누구 먼저랄 것 없이 비죽 올라갔다. 그러나 약속이라도 한 듯 심호흡을 한번 고르고 고개를 홱 돌린다. 암묵적인 휴전 선언이다. 그야 이런날 우리까지 싸우면 ‘화해 기원 이벤트’ 같은 건 물 건너 갈테니까. 피크닉 당일까지 메뉴선정부터 일정 계획 등등에 시달렸던 걸 생각하면 사소한 일로 말아먹기엔 그동안의 수고로움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이벨린은 누나인 내가 봐주는 거라며 스스로를 다독이곤 그라인더를 쥐었다. 프로슈토 작게 갈린 통후추를 스치듯 뿌리고 홀그레인 소스를 얹는다. 다른 한 장의 빵을 덮어 손바닥으로 누르면 층층히 쌓인 재료들이 안정감있게 자리를 잡는다. 맛있는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기분이 좋아지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상대의 밉고 싫은 점도 조금은 가려지니까. 지극히 단순한 원리로 만들어진 샌드위치가 차례로 피크닉 바구니에 담긴다. 상대적으로 많이 먹는 디에고와 이벨린은 세 개씩, 보는 한 개. 진의 몫으로는 샌드위치 반 개에 버터헤드와 로메인을 섞어 따로 만들어둔 샐러드!

후식으로 준비한 과일은 희고 깨끗한 과육이 변색되거나 상하지 않도록 레몬즙을 드문드문 뿌려둔다. 딸기와 포도, 사과를 틈없이 담아둔 플라스틱 용기도 바구니에 들어간다. 에이드용으로 준비한 청과 탄산수, 일회용 음료수 컵까지 챙겨넣은 이벨린 옆으로 보가 다가온다. 미리 뽑아둔 체크리스트에 하나하나 볼펜으로 표시해가며 빠진 게 없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냅킨이랑 포크가 없는데? 빨대도.
―아 맞다! 어제 사왔는데.

분홍색 하트가 자잘하게 프린트 되어있는 냅킨, 위에서 바라보면 하트모양이라 미치게 낯간지러운 빨대는 이 피크닉의 목적이 무엇으로 변모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오버라니까 진짜. 그래도 보면 웃음이 날 걸? 네 마음대로 해라…누가 말려. 물론 웃기긴 했다. 닫힌 바구니를 도로 열어 포장지를 뜯지 않은 것들을 죄다 밀어넣자 어느새 열한 시가 거의 다 되었다. 보는 창고에서 피크닉 매트를 꺼내오며 이벨린을 불렀다.

―씻고 얼른 옷 갈아입고 와.
―응! 넌 어쩌고?
―부엌에 내려오기 전에 이미 이 상태였는데.

이벨린이 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디보자. 색 맞춰 입기로 한 가디건을 어깨에 두르고, 귀찮다면서 마다했던 두건도 잘 쓰고 있다. 단정하고 햇볕에 잘 마른 옷에서 좋은 냄새도 나고. 통과! 마지막 점검차 피크닉 박스 안을 들여다보자 갓 구운 빵과 싱그러운 채소냄새, 그리고 고소한 햄과 상쾌한 에이드까지 어우러져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성큼 자라난 봄이 집 안까지 성큼 들이닥친 것 같아서 이벨린은 계단을 뛰어올라 방으로 향했다. 어젯밤 자기 전에 꺼내놓은 연두색 스카프와 맵시있게 어울리는 원피스는 올해 처음 입는 옷이었다. 기분 좋은 날 입으려고 산 거니까 역시 오늘 입어야지.

5월은 이상하게도 그런 사소한 결심을 배신하지 않는 달이었다—물론, 그 과정이 다소 시끄럽고 번거로울 수는 있었지만. 그리고 이 남매는 시끄럽고 번거로운 것을 다루는 데 제법 일가견이 있었다.

화해를 부르는 마법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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