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밤을 지나 새벽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자정을 넘긴 시계와 시선이 맞자, 일에 열중하느라 여태 자각하지 못했던 미미한 허기가 느껴졌다. 디에고는 가볍게 뒷목을 주무르며 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너클을 세게 쥐어 핏기가 가셨던 손바닥에 다시 혈색이 돌았다. "수고." 퍽 사교적인 인사는 미션을 끝맺는 절차의 일부다. 이름 모를 12구 사람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어렵진 않았으나 긴 싸움으로 피로에 희게 질린 표정이 말 그대로 백지장 같았다. 반면에 바닥에 쓰러져 안면 형태를 잃은 사체는 상반될 정도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뒷골목에서 죽은 사람의 인권을 챙겨주는 상냥한 인간은 없다. 있다고 한다면 분명 미친놈이다. 디에고는─불행하게도─광인과 성자,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 잃은 머리를 발로 밀며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3시 13분도 머지않았다. 그 순간 당할 일에 비하면 하찮은 모욕이다. 도시에는 나뒹구는 시체를 애도하는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 수도 없이 많다. 이를테면 연합 거처에 어떤 음식이 남아있을지 맞춰보는 일, 같이 즐거운 생각 말이다. 어쩌면 소고기 버섯 칼국수, 불갈비 토스트, 불고기 덮밥, 순댓국…
…은 없었지만, 정갈하게 정리된 I사의 밀키트 중 쓸만한 게 있었다. 있다 못해 반쯤 무너진 12구의 뒷골목에서 배 곪지 않고 싶다면 거처를 찾으면 되겠다 싶은 양이었다. 대식가들을 위한 배려일까. 그러고 보니 연합원들 사이에서 유독 인기 좋은 J사의 밀키트도 군데군데 끼어있었다. 그렇다는 건 그에게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식품이지만. 탈출하다시피 떠난 거주 구역을 상기하며 디에고가 I사의 밀키트 중 하나를 손에 쥐었다. 「밀푀유 나베 밀키트」확률성 도박 없이 투명하게 완제품을 표기한 말끔한 겉면에 I사 로고가 크게 찍혀있었다. 그 아래에 작게 상품 설명이 따랐다. 요리를 못해도 걱정 없는 밀키트 시리즈. 시원한 육수와 재료들의 조화를 느껴보세요. 돌려서 뒷면을 보아도 재료는 표기되어있지 않았지만, 도시에선 일상이다. 야식 삼기에는 이보다 적절한 음식도 없을테다. 그리고 야식에는 무엇보다 술이 필요한 법이고. 익숙하게 술을 찾아 마저 찬장을 뒤지는 디에고의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해?" 마르하레테였다. 언제고 자기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말과 행동은 꼭 시차를 갖고 이뤄지지 않는다. 통상적인 대화 흐름의 약속은 몇 사람들 앞에서 무력하다. 질문과 손이 동시에 그를 붙잡았다. 안대로 가려져 한쪽뿐인 시선이 포장을 흝으며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굳이 답을 들을 거라면 사람을 잡아챌 필요는 없지 않나. 디에고는 생각했지만, 마르하레테에게 이런 말을 굳이 뱉는 건 손해 보는 행동이다. "야식." "혼자?" "그럼 야식 먹자고 사람 깨우겠어." "밥 먹다 외로움 타는 거 아니야."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더욱. 허튼 농담에 디에고는 날파리 쫓듯 비어있는 손을 저었다. "가서 볼일이나 봐." 마르하레테가 아랑곳 않고 웃었다. "나도 먹어야겠다." "누가 준대." "이것만 먹을 거야?" 마르하레테가 기교 없이 멀쩡한 플라스틱 포장지를 한 번 흝었다. 이미 완성된 식사를 나눠주는 것은 기정사실화 된 듯한 반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될 미래를 디에고 역시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다지 배가 고픈 것도 아니면서. 탄식 같은 헛웃음이 대화 사이를 스쳐갔다. "뭐가 더 필요한데." "글쎄. 그대로 먹으면 재미 없잖아." "대단한 미식가 납셨어…" 그보다 어째서 간단한 식사에서 맛이 아니라 재미를 추구해야 한단 말인가. 시선은 질문을 담고 있었지만, 걸맞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르하레테는 어느새 디에고를 등 진 채 선반을 뒤지고 있었으니까. 붉은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노려보건 말건, 아랑곳 않고 밀키트 사이를 뒤져보던 마르하레테가 마땅히 '즐거운' 재료를 찾지 못했는지 시선을 떼었다. "뭐 있나 보고 올게." "가서 잠이나 자." "먼저 시작하지 마라?" 디에고는 말없이 밀키트 포장을 까기 시작했다. 밀키트 두 개. 선명한 웃음소리만 남기고 마르하레테가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아 시작한 조리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I사 밀키트는 설명에 충실한 제품이며, 디에고가 해야 하는 건 딱 두 가지뿐이었기 때문이다. 휴대 버너의 불을 켜고 냄비에 밀키트를 쏟아붓는 것. 이후엔 물이 끓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놀라운 날개 기술의 힘이죠! 유일한 문제는 아직도 술을 찾지 못했다는 사실뿐이다. 술이 없을 리는 없었다. 연합에 상주하는 인원 중 음주를 즐기지 않는 쪽이 소수였다. 태반은 근무 시간에 술을 마시지 말란 지시를 들어본 적도 없다는 듯 행동했으니 (실제로 그런 지침은 명시된 적 없기도 했다), 어딘가에 누군가 숨겨둔 알코올이 분명 있을 것이다… 선반을 지나 서랍장을 열어보기 시작한 디에고의 뒤로 새롭게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고 있나?" 알레시아가 마르하레테를 보며 물었다.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던 마르하레테가 잽싸게 자세를 바로하고 고개를 숙였다. "언더보스." 세상 방자하게 살아가는 카포들의 정중한 대접을 누리는 사람은 12구에서 알레시아가 유일했다. 환대는 타인에게나 특별하지 그에게는 일상이니, 알레시아는 고개만 까딱여 인사를 받고 답을 기다렸다. 마르하레테가 냉장고 방향을 슬쩍 턱짓했다. "디에고가 야식을 차리고 있어서요. 넣을 게 있는지 보러 왔습니다. 별 것 없네요." 휑한 냉장고 속에는 파와 고추, 마늘 따위의 식재 밖에 없었다. 음식의 입출만큼 성실하지 못한 청소 탓에 남은 부스러기들을 제외한다면. "도둑이라도 들었나봅니다." 그 순간 두 사람이 떠올린 음식 도둑의 얼굴은 아마 일치할 것이다. 그의 식성 또한 특별한 일은 아니다. 흥미로운 주제는 아니었으니 화제가 곧 옮겨갔다. "디에고가 요리를?" "아." 실상보다 조신한 단어 선택은 습관적인 놀림의 여파다. 당사자는 주방에 발도 들이지 않는 편이니, 의문도 당연하다. 마르하레테가 잠깐 웃으며 정정했다. "I사의 밀키트를요." "아아, 그쪽이군." 알레시아가 납득하며 찬장에서 컵을 꺼냈다. 마르하레테는 자연스레 물병을 집어 그의 컵을 채웠다. 찬 물을 따르는 소리만 잠시 주방을 채웠다.
곧 마르하레테의 시선이 향신료뿐인 냉장고 대신 눈앞의 언더보스를 향했다. 한치도 흐트러짐 없는 차림에서 피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알레시아는 아랫사람에게 유약함을 내비치지 않는 사람이고, 연합에 그의 윗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신 마르하레테는 상황을 근거로 적당히 추측했다. "일은 마무리 되셨습니까?" 예상대로 알레시아가 목을 축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치는 전부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손한 인사 뒤에 큰 고민 없이 본론이 붙었다. "함께 드시겠습니까?" 상사와의 식사자리를 꺼리는 사람은 도시에도 가득하다. 하지만 엄지들은 대체로 예외에 속했다. 비록 그것이 턱이 날아가거나 혀를 잘릴 위험이 산재한 시간이라고 해도. 그리고 셋 중 둘은 그 가능성도 재미라고 말할 것이다. 반대로 존중받는 상사답게, 알레시아는 구태여 편한 자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취미가 없었지만… "그러지." 그들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예상보다 빠른 수락에 마르하레테는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데이트 신청에 성공한 사람처럼. 알레시아가 희미하게 웃음을 흘리며 컵을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저건 가져가지 않는건가?" "예?" 알레시아가 냉장고를 눈짓했다. 마르하레테는 반사적으로 흰 가전의 방향을 바라보았다. 안에 든 재미없는 향신료는 어쨌거나 요리의 기본 재료들이다. 그렇다고 손질 없이 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마르하레테가 어깨를 짧게 으쓱이고 식칼을 들었다.
한 사람의 야식이 모르는 사이 세 사람의 식사자리가 되고 있던 한편, 디에고의 뒤에 선 것은 기예르였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건지 희미하게 바깥 냄새가 났다. 제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대충 문질러 닦으며 기예르가 물었다. "뭐해?" 서랍장 안에도 따로 술은 없었다. 디에고가 문을 닫고 고개를 돌렸다. "야식 먹으려고 술 찾는 중이다." "오~ 혼자?" "마르하레테 녀석이 먹겠다곤 하던데. 넣을 거 있는지 보겠다고 사라지더니 아직 안왔어." 그 사이에 전골은 천천히 끓기 시작했다. 기예르가 걸음을 돌려 식탁 위에 팽개쳐둔 I사 밀키트 포장지를 주워 들었다. 요리를 못해도 걱정 없는 밀키트 시리즈. 시원한 육수와 재료들의 조화를 느껴보세요. 캐치 프레이즈와 I사 로고까지 확인한 그가 다시 포장지를 버려두었다. "왜 J사 거 안 먹고." "먹겠냐, 그걸." 디에고가 J사 제품을 죄다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묻는 것이다. 찌푸린 미간을 보며 깔깔 웃던 기예르가 대뜸 말했다. "나 곱창 있는데." 그가 의수를 들어올리며 검은 비닐봉지를 흔들었다. 불투명한 탓에 내용물을 볼 순 없지만, 바스락거리는 봉지 안이 묵직해보였다. "뭐. 넣겠다고?" "어." 애초에 곱창은 왜 사온건데. 즉각 수락하지 않자 기예르가 디에고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내가 가져온 건 못 넣겠다?" 웃는 낯이지만 농담 사이로 뼈가 섞여있었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치고 있던 디에고가 눈썹 한 쪽을 올렸다. "그런 소리 안했어." 그럭저럭 합격점인 대답인 듯 했다. 짐승처럼 깜빡임 한 번 없이 그를 응시하던 기예르가 씩 웃었다. 하여간 엄지 여자들은 일상 중에도 기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데 탁월한 소질이 있었다. "하는 김에 재료 더 넣자." "왜 그런 번거로운 짓을 하는데." "그대로 먹으면 재미 없잖아." 혹시 이 대화 루프물인가? 디에고의 말문이 막힌 사이 기예르가 아랑곳 않고 덧붙였다. "손 보면 더 맛있기도 하고~" "하여간 귀찮게." "그럼 I사 밀키트가 더 좋다?" 모종의 직감이 디에고의 골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제멋대로 구는 여자들을 상대로 드는 직감을 무시하지 않음으로 살아남은 인간이었다. "맘대로 해라…" 세 번째 밀키트의 포장을 벗기며 디에고가 힘없이 대답했다.
기예르는 그렇게 했다. 식탁에 올려놓은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는 곱창, 양파, 그리고 전골에 들어가지 않게 된 몇 식재료들이 튀어나왔다. 더해서, 그가 찾고 있던 술 몇 병도. 무게의 정체를 알게된 디에고가 소주병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일을 다녀온거냐 장을 보러 간거냐." "내일 저녁 재료야." 설명은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기예르가 추가 서술 대신 양파 하나를 던졌다. "이거나 썰어봐." "내가?" 반사적으로 양파를 잡아챈 디에고가 눈만 깜빡였다. "양파도 못 썰어?" "못 써는데." "여태 양파 써는 법도 안 배우고 뭐했어~" "주먹질 하는 법 배웠다." 농담인 동시에 진담이었다. 애초에 칼질은 디에고의 주 분야도 아니거니와, 그렇다고 재료를 패서 으깰 순 없는 노릇이다. 그가 괜히 동거인들에게 주방 출입을 금지당한게 아니었다. "쓸모 없기는." 웃는 낯이 어쩐지 즐거워보인다면 착각일까. 손에서 도로 뺏어간 양파를 썰면서 기예르가 문득 냄비를 보았다. "다른 거 넣을 거 없나." "뭘 더 넣겠다고." "매운맛 폭탄 만두?" 디에고가 확률형 어둠의 밀키트와 차이점을 좁혀가려는 전골을 구출해냈다. "관둬. 밥을 재밌으라고 먹나." "하여간 재미없긴." 그래도 식사 앞에선 상식이 유하게 받아들여졌다. 기예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추가 재료를 더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곱창과 양파, 양념과 육수를 추가한, 한때 밀푀유 나베 밀키트였으나─이제는 곱창전골이 된 냄비가 느리게 다시 끓고 있었다. 희고 정갈한 방이 다소 이질적인 향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곳에서 식사하는 인원이 한둘은 아니니 특별히 낯선 일은 아니었지만. 한가로이 거품을 걷어내며 앉아있던 두 사람이 발걸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더보스." "오셨습니까." 알레시아가 손을 내 저을 때까지 숙인 고개는 유지되었다. 누군가는 징그럽다며 질색할 광경이지만, 상기 인원들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의자를 빼주는 건 조금 더 가까운 디에고의 몫이었다. 그가 자리를 빼주며 마르하레테에게 시선을 건넸다. '뭐야.' 마르하레테는 대답하는 대신 파와 마늘이 담긴 그릇을 든 채 어깨만 으쓱였다. 평온하게 자리에 앉은 알레시아가 질문 없이 설명했다. "마르하레테가 함께 식사하겠냐고 하더군." "아아."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둘의 어깨 힘이 빠졌다. 기예르는 누그러지다 못해 완연히 기쁜 기색이었다. "영광입니다." 알레시아가 전골을 바라보며 물었다. "밀키트라고 하더니?" "기예르가 손 좀 봤습니다." "그랬나." "예." 손질된 파와 마늘도 이견없이 냄비 속으로 흘러들었다. 식사는 이미 완성에 가까운 상태였으니 다 끓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예르가 퍼담은 그릇이 알레시아의 앞에 놓이고, 세 쌍의 시선이 그를 얌전히 기다렸다. 첫 술을 뜬 알레시아가 간결하게 평가했다. "맛있군." 아마 어린 카포를 이보다 기쁘게 할 문장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남은 인원도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만족한 감탄사가 짤막하게 스쳐지나갔다. 그릇을 반쯤 비운 디에고가 술병을 꺼내다가 문득 물었다. "그런데 이 곱창은 어디서 난거야?" 기예르가 디에고를 잠시 째려보았다. "언더보스한테 이상한 걸 드렸겠어." "누가 그렇대. 그냥, 어디서 났냐고." 요리 준비를 보지 못한 두 사람은 검은 비닐봉지를 보지 못했다. 대화를 흥미롭게 관전하는 알레시아의 모습에 기예르가 눈을 굴렸다. 잘 익은 곱창이 냄비 안에서 통통하게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