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학교의 커리큘럼은 훌륭하기 그지 없어 학생의 미덕을 단순히 문무양도에만 규정짓지 않았다. 모자란 부분이 있으면 채워주고, 미숙한 면모를 발견하면 단련 시킨다. 검의 날만 세운다고 명검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그러니 비체가 하필 테리오스에게 청사자반의 훈련 후 디저트를 맡긴 것도 깊은 뜻이 있을 터였다. 불이 있으면 졸이고 태울 줄 아는 둔석의 면모를 단련하려는 것이지, 모르는 게 아닐 거다.

테리오스는 그쯤 생각하다가 고개를 젓고 사과를 들었다. 그의 장점은 비꼬는 게 아니라 막무가내로 난관을 돌파하는 쪽에 있었으므로. 보라. 벌써 훈련이 효과가 있지 않은가?

훈련은 오후 세시에 예정되어 있었다. 간단한 순찰이 결합된 훈련으로, 비체는 성장기 학생들을 위해 사과파이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청사자반에는 특히나 허약한 학생이 많았다. 적절한 때에 영양을 보급하는 걸로 학생들의 원기를 돋을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하필 미룰 수 없는 서류 업무가 발견되었다. 제보자, 테리오스는 비체 대신 주방에 남아 치르기로 했다. 적당한 등가교환이었다. 반죽은 이미 다 된 것 같고, 레시피도 있는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사람을 불러요.”

깜짝이야. 테리오스가 뒤를 돌자 언제 온 건지 파스칼이 기웃거리고 있었다. 연무장이면 몰라도 주방에 할 일 없이 오는 인선은 아니었다. 아마….

“선생님은 여기 없는데.”

“그런 것 같네요. 여기서 뭐해요?”

눈 앞의 테리오스가 소매를 걷어부치고 손에는 밀가루를 펴바르고 있어도 절대로 사태를 이해하지 않겠단 태도였다. 덕분에 테리오스는 비체가 남은 서류를 정리하러 간 것과 자신이 남아 청사자반의 오후 간식을 만들고 있단 내용을 소상히 반복해야 했다.

“메뉴가 뭔데요?”

“사과파이.”

“아.”

갑작스러운 흥미. 파스칼이 몸을 숙여 테리오스의 옆으로 끼어들었다. 이슈트반의 특산물이 사과인 건 알아도 이때의 테리오스에게 파스칼과 사과를 연결 짓는 능력은 없었으므로. 테리오스는 잠자코 파스칼이 레시피북의 책장을 넘기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필링을 반죽으로 싸서 굽는 형태네요.”

“잘 아네.”

“많이 먹어봤으니까요.”

“그래? 그래….”

애매한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파스칼이 선수를 쳤다.

“도와드릴게요.”

“요리 해본 적 있어?”

“아뇨. 요리는 선생님과 빵을 만들었을 때가 다인데요.”

테리오스가 눈썹을 치켜 들었다. 이번에는 분노가 아니라 의외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도와주겠다고?”

“테리오스만 두었다가 청사자반의 평판이 낮아지면 어떡해요. 한 사람이라도 붙어 있는 게 낫겠죠.”

“너는 정말….”

욱한 동급생을 지나쳐 파스칼은 레시피책을 들었다.

“사과부터 자르라네요.”

“돕는다며. 그건 명령 아니냐? 그리고 그 정돈 나도 알아.”

“그럼 손이 멈춘 이유는?”

“재료를 다 꺼내놔야 만들기 간편할 텐데. 뭐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밀가루 묻은 손가락이 친절하게 하나, 하나 재료의 이름을 짚었다. 파스칼의 눈이 그것을 따라 주욱 목록을 훑었다.

“들어가는 게 이것 뿐이에요?”

“그게 재료 목록이라 부르는 거니까. 아무래도. 뭐가 궁금한 건데?”

“이상하네요. 설탕, 소금, 시나몬? 분명 고향의 주방에선 뭔가 더 넣었던 것 같은데요.”

“그것들만 넣으면 안돼?”

“맛이 단순하고 심심해지지 않을까요?”

모범생 둘은 언제나 그렇듯 주어진 답을 찾으면 부차적인 고민을 추가했다. 스스로 해내지 않는 연마는 더욱 가치 없는 것이다.

“그럼 네가 아는대로 꺼내 봐.”

“그래도 되나요?”

“선생님이 맡긴 거니까 기왕이면 잘 만들고 싶어.”

파스칼은 눈썹을 찌푸리며 생각나는대로 떠올렸다.

“생강이랑 육두구…. 정향도 좀 들어간다고 했던 것 같고요. 그리고 레몬즙이나 호두를 넣을 때도 있었네요.”

“다 기억해?”

“페이가 보고 와서 말해주곤 했거든요.”

“그러는 동안 넌 한 번도 조리 과정은 안 봤고?”

“그런데요?”

이쯤 되니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돌아간 전 동급생이자, 현 동급생의 쌍둥이 동생에 대해선 할 말이 사라졌다. 테리오스는 얌전히 칼을 들어 사과를 썰었다.

“이게 뭐죠.”

사과를 살해했다.

“주사위 모양으로 썰라며.”

“말은 잘 들었는데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거지?”

“혼잣말인 척 다 들리게 하지마. 어쨌든 속으로 들어갈 거잖아. 그리고 처음만 길을 잘못 잡은 거지, 이후로 썬 것들은 멀쩡해.”

사과를 반쯤 살해한 것으로 정정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뭐예요?”

“남은 향신료도 네가 넣어. 난 종류도 모르니까.”

세 번쯤 스푼에 뜬 소금을 깎아내던 파스칼이 다시 눈살을 찌푸리며 레시피책을 가져왔다. 물론 그곳을 뒤져 보더라도 이슈트반의 특제 사과파이 레시피가 계시처럼 떠오를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발을 뺄 수도 없었다. 파스칼이 여태 한 일은 계란을 몇 알 까서 보울에 넣고, 소금과 설탕 계량에 씨름한 일 뿐이었다. 손을 사과즙으로 더럽혀가며 동급생들이 먹을 분량 만큼 사과를 자른 노동량과 균형이 맞지 않았다. 양심이란 참으로 귀찮은 생물. 파스칼은 미련 없이 소금을 털어넣고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선 설탕.”

내려놓았다.

“육두구.”

내려놓았다.

“정향, 생강가루, 노간주 말린 것? 뭐. 괜찮지 않을까요. 로즈마리? 고기 파이에 넣는 것이니 괜찮겠네요.”

뭘 많이 내려놓았다. 테리오스가 미간을 좁혔다.

“잠깐. 얼마나 넣을 건데?”

“조금요. 모험을 할 순 없잖아요.”

“조금이 얼마야.”

“조금은 조금이죠.”

필링 위로 쌓이는 가루들은 확실히 조금 같았다. 양은 확실히 적었다. 게다가 테리오스의 눈으로 보기에 조금씩 크기를 달리한 계량스푼들은 뭐가 담기든 ‘조금’이 맞긴 했다. 여덟 명 분량의 사과파이여서 그런지 코에 스미는 향도 사과의 달콤한 냄새 뿐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물론 이 납득은 파스칼이 시나몬 통을 쥐기 전까지 일이었다.

“이건 많이.”

“잠깐.”

“넣어도 되겠죠?”

테리오스가 손을 뻗었을 때 파스칼의 손목을 잡는 데는 성공했으나 투하된 가루는 잔여를 남기며 사방으로 퍼졌다. 이미 필링의 색은 바뀌어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그걸 내려다 보았다.

“…많아.”

“페이가 달지 않고 향이 좋은 이유는 시나몬을 많이 넣어서라고 했거든요.”

“페이가 분량을 말해줬어?”

“그건 말 안했는데요.”

테리오스는 파스칼의 손목을 놓았다. 그리고 레시피북을 덮었다. 필요 없어졌으니까. 다시 열었다. 굽긴 해야지.

“호두는 어떻게 할까요? 말린 걸 찾았어요.”

“마음대로 해.”

“그럼 넣을게요.”

테리오스는 그 모습을 보면서 가르그 마크 커리큘럼의 위대함을 다시 생각했다. 분명 이 상황에도 어떤 뜻이 있을 것이다. 화를 참는 훈련이든, 결과를 기다리는 인내든, 아니면 적어도 청사자반 학생들이 이걸 먹고도 살아남는지 확인하는 시험이라든가.

“반죽 좀 펼쳐주세요.”

“진짜 이게 맛있을 것 같아?”

“페이 말로는요.”

페이한테 물어보고 싶다. 직접.

필링을 조리는 동안은 잠시 둘 다 말이 없었다. 테리오스가 장작을 한 짐 들고 왔을 때도 파스칼은 별말 없이, 기탄없이 말하자면 무시하고 졸아들어가는 사과를 바라 보았다.

그 뒤로는 꽤나 수월했는데 비체가 미리 반죽을 잘라두었고, 테리오스가 펼쳐두었으니 필링을 얹고 다른 파이지로 덮으면 될 일이었다. 정확히 아홉 개의 파이를 만들고 나서야 일찍이 분리해둔 계란 노른자의 쓰임새도 알았다.

“마지막으로 칼로 모양을 내고 노른자를 바른다.”

“여기에 바르는 거였네요. 그런데 왜?”

“몰라.”

“하지만 할 거죠?”

“이미 엄청난 모험을 한 것 같아. 제발 이건 지키자.”

“그래도 어쩐 일로 화는 안 내네요.”

내가 그랬나? 테리오스는 행동을 뒤돌아 보았다. 물론 파스칼은 평소처럼 재수 없게 굴었다. 뿐만 아니라 저 필링이 맛있다면 기적일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홀로 만들었을 미래를 생각하면….

“울고 싶던 차에 뺨 맞은 거랑 비슷하지.”

“무슨 소리죠.”

“넌 어쩐 일로 침착하네.”

파스칼 역시 비슷한 자기 회고를 하는 듯 했으나, 언제나 그렇듯 표정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오븐을 열라고 신호했을 뿐.

“과일이나 다른 음식들을 챙겨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동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면.

결국 냄비를 바꿨다. 실상 냄비가 두 개밖에 없었으니 지나치게 호화로운 식사였다.

업사이드다운 형태는 바닥부터 시작한다고 파스칼이 설명했다. 설탕을 녹여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사과를 얹고, 반죽을 덮어 구운 다음 뒤집는 것. 테리오스는 별다른 말 없이 들었다. 그리고 장작을 더 밀어넣으려다가 손등을 한 대 맞았다. 아프지도 않은 손등을 쓸며 테리오스는 말했다.

“나는 그냥 잡는 걸로 봐줬는데.”

무슨 소리냐며 파스칼이 한 번 돌아보았다가 그저 가만히 차가운 바람을 맡기로 했다. 탁 트인 평야에는 이제 막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숲을 등지고 해가 져서 오랜만에 넓은 황혼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런 저녁을 배경으로 가장자리부터 천천히 설탕이 그을리는 냄새가 피어 올랐다. 모든 게 물러지고, 물러지다가 또 굳을 것이다. 요리란 변형의 예술이다. 가르그 마크나 전장이 그 시절 학생을 연마했듯이 파이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바뀌는 동안에 딱히 할 일은 없었다. 지켜보는 것 외에는.

“시나몬이 너무 많이 들어간 것 같은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파스칼은 짧게 웃었다.

“어차피 설탕이 많이 들어갔으니까. 사과가 달지 않아서 향신료로 맛을 좀 내는 게 좋겠어.”

“그게 상쇄가 돼?”

“페이 말로는.”

또 페이인가. 테리오스는 짧게 웃고 말았다. 그래도 제법 페이다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찬 바람을 맞는 야영 중에도 파이 한 조각을 챙기게 되는 것도.

“맛있을 것 같지만. 진짜 맛있으면 어쩌지.”

“뭘 어떻게 해?”

“너무 호화롭단 말이지. 지금 낙오 중이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 시절 비체가 서류 업무로 자리를 비운 바람에 엄청나게 달고 쓴 사과파이를 청사자반 학생들이 한 입씩 베어문 것처럼. 이번의 주걱과 밀대를 들게 한 피치 못할 사정은 낙오였다. 찻잎만 있어도 감지덕지인 상황에 상비약에 가까운 향신료 주머니까지 털어 파이를 만든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면 길을 찾을 수 있단 자신에.

가르그 마크의 테리오스라면 말렸겠지만 오늘의 테리오스는 왠지 괜찮았다.

말발굽 자국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고, 행운의 여신이 잠시 그들을 버려두긴 했지만 어디서나 가문의 문장 펜던트로 망토를 고정한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겠는가. 어쩐 일로 화낼 기회와 어쩐 일로 독설할 기회도 잠시 내려 두어도 됐다.

“기대해도 돼. 내가 만들긴 했지만 재료는 좋은 거 썼으니까.”

“그런 이야기 아닌 거 알잖아. 그래도. 자신감의 근거가 재료야?”

“이슈트반에서 가져온 사과인데.”

진지하게 말하는 옆모습으로 불길이 일렁였다.

설탕물이 몇 번 더 차오르자 덮은 냄비에도 그을음과 함께 캐러멜이 달라 붙었다. 파스칼은 나무 주걱으로 그것을 긁어내다가, 무슨 생각인지 테리오스의 입가에 들이밀었다.

당연하게도 달고 쓴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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