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녹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도 요 며칠 눈이 좀처럼 내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산케쿠르가 아무리 눈의 고장이라고 해도 매일같이 눈이 내리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은 잠깐의 변덕일 것이라 생각했다. 또 눈이 그치는 동안 서로의 얼굴에 눈덩이를 던지며 노는 것이 고적한 마을의 얼마 없는 유희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 이 정도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한두 주가 지난 후, 마을에 흐르는 공기 사이에 따스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주 미묘하고 느린 속도였다. 기민한 누군가가 이를 알아채 모두에게 알렸지만 기우로 여겨졌다. 코레이는 뼈장식을 깎다가 바람을 타고 날아온 기묘한 무언가에 의해 자주 재채기를 했는데, 그 또한 그 애의 개성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완전히 온화해진 기후가 발 밑의 눈을 스르르 녹여 없애기 시작하자 마을에서 제일 둔감한 이마저도 변화를 알아챌 수밖에는 없었다. 이윽고 모두의 마음속에서 같은 불안이 피어오른다.

마을에 이상이 있는 걸까.

왕성의 짓인 걸까.

우리의 평화에 균열이 생기나.

 처음은 누군가 가볍게 던진 작은 걱정거리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일듯이 걱정은 불안으로 불안은 공포로 산불처럼 번져나갔다. 소문과 추측은 사실이 되었고, 마을에 큰 해가 생겨도 단단히 생기리라는 저주문이 계시처럼 돌았다. 비마 선생은 막 분화를 마치고 두려움에 빠진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던 애를 썼다.

 몇명은 밖으로 나갔다. 그 이유가 꼭 날씨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남아 있는 사람들은 생활 방식을 바꾸어야 했다. 두꺼운 밍크를 계속 입고 있으니 온몸에 열이 올라 땀에 푹 젖고 말았으니까. 살면서 처음 겪는 날씨에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불을 피우거나 온실로 들어서면 느껴지던 잠깐의 따뜻함이 이렇게 온 세상 곳곳에 퍼질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흙바닥에서 썰매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관리가 덜 된 신전 구석에서는 건조한 먼지냄새 대신 후끈하고 불쾌한 냄새가 풍기기도 했다. 또 집집마다 가장 추운 곳에 보관해둔 식재료가 상하기도 했는데, 그 피해는 빵집과 도살장이 가장 컸다. 그러고도 한두 주가 더 지났다.

 왕성으로 떠났던 일랑이 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봄이 왔어!”

*

 튤립, 수선화, 라벤더, 블루벨, 프림로즈. 일랑이 온실 바깥에 놓아둔 꽃이 향을 바람에 실어 보냈다. 라벤더는 봄이 오기 전에도 온실에서 볼 수 있었고, 그 때에도 주인을 닮아 있었다.

 일랑은 따뜻한 날씨에 익숙해 보였다. ‘역시 왕성은 대단한 곳이구나.’ 애들은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알려준 새로운 개념을 익히는 것에 시간이 걸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과 개화. 우리는 우리가 서있는 곳이 겨울인 줄 몰랐다. 그녀는 봄과 겨울은 서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계절이며, 그 사이에 여름과 가을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는 애들은 그 말을 듣고 저마다 마음 속에 여름과 가을을 그려보았다. 눈이 내리는 가을. 튤립으로 뒤덮인 한여름 같은 것들. 그것들을 밖으로 낼 때마다 일랑은 ‘후후.’하고 웃었다.

 몇몇 주민들은 마을 밖으로 떠난 자들이 이 광경을 못 보고 사라진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마을 밖은 이보다 훨씬 다채로웠을 것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봄이라는 것은 그만큼 기쁘고 새로우며 도전적이었다. 축축하고 미지근한 흙 사이로 싱그러운 수풀이 돋아났고, 그 사이로 햇볕이 조각처럼 흩어졌다. 거기에 코를 대고 숨을 한껏 들이마시면 알싸한 향이 폐를 가득 채웠다. 난생 처음 겪는 초록이었다. 겨울 동안에는 낮에도 집 밖에 나오지 않던 마을 사람들이 외부로 달려나와 정신없이 풍경을 구경했는데, 그건 마치 처음 보는 지식을 단숨에 빨아들이는 어린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허리까지 웃자라던 풀밭 사이로 길이 났다. 일랑은 잠시 온실을 닫아두었다.

 달이 기울었다. 마을을 가득 메운 화려한 꽃망울에서 잎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봄은 영원하지 않았다. 튤립, 블루벨, 프림로즈…. 모두 하나둘씩 시들어 버렸다. 흙길에 떨어진 꽃잎이 만개했다. 변한 건 꽃들 뿐만이 아니었다. 육포를 만들기 위해 널어둔 고기는 상하다 못해 짓무르고 썩어 벌레가 윙윙 꼬였다. 다들 그렇게 큰 벌레도 처음 보았을 것이다. 귀리 빵이 더 이상 맛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꽃냄새는 점점 옅어졌다. 마을 분위기가 축 처졌다.

 무언가 봄을 죽였다. 그 이름은 여름이다.  

 충격에 며칠 앓아눕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죽어가는 봄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있었다. 그건 라벤더였다.

 일랑은 마지막 민들레를 훅 불어 날린 다음, 가벼운 발걸음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책 사이에 꽃을 넣어 말리는 법과 싱싱한 야채 요리법을 가르쳐 주었다. 토록이 땅을 갈아내게 하는 법과 그 위에 씨앗을 뿌리는 법도. 여름 뒤에 가을이 올 때면 미리 뿌려둔 씨앗에서 뭔가가 자랄 거라는 사실, 그리고 그건 봄이나 여름에 본 꽃과 풀이랑은 전혀 다른 새로운 손님일 거라는 것, 하지만 미리 알려주면

재미가 없으니 직접 확인해 보라는 약간의 재치까지도.

 봄이 준 따스함도 적잖은 충격이었지만 여름의 더위는 더욱 심각했다. 저마다 이마부터 목까지 커다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떨어지고 있는 상태로 몸을 움직여 땅을 솎아내고,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었다. 한차례 장마가 지나갔다.

‘있잖니, 왕성은 일년 내내 봄 같은 날씨야.’

 일랑이 갓 딴 가지를 얇게 썰어내며 말했다. 그녀는 불이 살아있는 동안만 먹을 수 있으며 남겨두면 고기 기름과 함께 희고 딱딱하게 얼어 버리는 닭고기 수프 대신, 올리브와 호두, 박하, 으깬 감자를 넓게 썰어낸 가지에 돌돌 말아 구운 뒤 낮은 접시에 올린 요리를, 맹렬한 추위가 계속되는 동안 한정된 식량을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먹이기 위해 귀리와 기름을 물에 풀어 푹 끓여낸 흰죽 대신 싱싱한 샬롯과 양상추, 콩을 사과 식초와 함께 섞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둥글고 움푹한 그릇에 담아낸 요리를, 새콤짭짤하고 맛이 좋지만 분화를 앞둔 축제에서나 겨우 먹어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인 후추와 월계수 잎으로 간한 송어 구이 대신 호밀 반죽 사이에 시금치와 허브를 넣어 구운 파이 요리를 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현재 그녀가 썰어낸 가지는 같은 방식으로 채썬 토마토, 주키니와 양파를 올리브유에 볶고, 불에 데워 촉촉하고 걸쭉하게 퍼진 토마토 위에 올려 먹는 요리였다. 그녀가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이제 막 동화책을 읽기 시작한, 어린 세발족 아이였다. 비가 그치고 있었고, 비냄새 사이로 미묘한 냉기가 섞여들고 있었다…….

*

 누군가 마을과 마을 밖을 구분하는 능선을 따라 걸어 들어오자, 낙엽이 발에 밟혀 바삭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어귀의 큰 나무에 까마귀가 날아들었다. 그리고 낯선 방문자를 향해 큰 소리로 울어댔다.

 산케쿠르에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일도,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일도 아주 희귀한 일이다. 그리고 그 둘을 구별하는 방법은 까마귀를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주민에게 관심을 갖는 까마귀는 없었기 때문에, 이 까맣고 영리한 새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침입자를 경계할 때뿐이었다. 침입자는 허리를 숙여 바싹 마르고 색바랜 나뭇잎 하나를 주운 뒤 유심히 살폈다.

“가을인가…….”

 마침 어떤 소년이 여름부터 새로 난 길목에 쌓인 낙엽을 쓸고 있던 중에, 인기척을 느껴 잠깐 돌아본 사이 모르는 침입자를 발견해 버리고 말았는데, 평소 침착함을 가르치려 노력하던 부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제풀에 놀라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마을의 어른들이 각자 쟁기와 괭이를 들고 부리나케 달려나오는 일이 생기고 말았지만, 소년이 보고 놀란 불상의 침입자가 실은 오래전부터 마을에서 나고 자란 주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소년의 부모가 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 방문자는 갑작스런 위협을 받은 데 대한 사과의 의미로 소년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리고 조금 맹랑하고 담대한 성격이었던 소년은 자신이 이제 제법 어른다워졌으며 곧 분화를 할 예정이라는 말을 강조하면서, 손님께 직접 요리를

대접하고 싶다고 말했다. 부모가 말리려고 해보았으나 소년이 너무나 완강한 탓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소년 뒤편에 선 부모가 암묵적인 부탁의 뜻을 보냈음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만면에 화색을 띄우더니 손님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나도 가는 거야? 그가 물었다. 네, 왜요? 소년이 대답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당황한 부모가 쫓아왔지만 이미 얌전히 부엌으로 끌려간 채였다. 이번에는 그가 괜찮다는 눈빛을 보냈다.

 소년은 급하게 재료부터 꺼냈다. 그는 소년이 올려둔 토마토가 도마 위에서 굴러 떨어지려는 것을 받아내거나 가지가 담긴 포대자루를 힘겹게 끌어오는 소년의 반대편에서 함께 자루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자루에서 꺼낸 가지는 시원한 바람과 온화한 햇빛을 머금어 싱그럽고 상쾌한 향이 났다. 소년이 서툰 손길로 토마토에 칼날을 찔러 넣었다. 도마에 칼이 부딪치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잘 썰리지 않으면 손님을 바라보고 개구장이처럼 웃기도 했다.

 아저씨, 이름이 뭐예요? 아저씨라고? 네. ……. 제 이름은 일랑이에요. 뭐? 일랑이 요리를 가르쳐줬어요. 엄청 오래 전에. 다시는 이 마을에 오지 않겠대요. ……. 그래서 제가 이름을 달라고 했어요. 저는 사실 입양아거든요. 일랑이 마을을 떠나고서 지금 엄마 아빠가 생겼어요. 소년은 두서없이 말을 쏟아냈다. 아마도 들어줄 이 없이 어린 심장 부근을 맴돌던 이야기다. 사실 반가웠어요……저는 여기서 태어난 게 아니거든요……좀 외로워서요…… 소년의 손이 느려졌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는 건 무서워요……아마 평생 여기 살겠죠. 부엌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는 자른 토마토, 가지, 주키니를 그러모았다. 나도 그랬어.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올리브유를 두른 달군 팬 위에 야채가 올라가며 고소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엄청 어렸을 때, 혼자 지냈어. 아마 네가 말한 그 때랑 비슷하지 않을까. 정말요? 응. 소년은 토마토를 으깨면서 조금 웃었다. 그럼 우린 친구인 거구나.  

 다행히 요리는 성공적이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야채는 새콤하고 고소한 맛을 냈다. 초저녁 노을이 물든 창 밖으로 단란한 말소리와 식기가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이따금 웃음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음식을 거의 다 먹어갈 즈음, 부모가 먼저 정리를 위해 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둘만 남게 되자 소년은 부엌 쪽에 몇 번 눈길을 주더니,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오늘 고마웠어요……저 마지막으로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소년이 손을 꼼질거렸다. 뭔데? 그가 대답하자 소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가 따라 들어가자 소년은 나무로 만든 작은 선반에서 책을 꺼내들어 몇 장 넘겼다. 포도알처럼 작고 오밀조밀한 꽃잎이 보였다. 라벤더였다.

 소년은 떠나는 손님을 마을 입구까지 따라나와 전송했다. 나중에 또 봐요. 꼭 돌아와야 해요. 그는 대답 대신 등을 돌린 채 팔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향해 소년이 뭐라고 더 소리를 쳤지만, 걸음이 빠른 탓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마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일랑이 그랬던 것처럼.

 너는 이 마을이 사랑스러운 것 같으니까, 계속 그 마음을 간직하는 편이 좋아.

 무성했던 나무가 점점 드물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숲의 경계였다. 타리그는 어쩐지 가벼운 걸음으로, 완전히 마을을 벗어났다. 그리고 잘 말린 라벤더를 안쪽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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