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버터를 주걱으로 천천히 풀고, 설탕을 고루 섞어주세요
“맛있는 냄새!”
헬렌의 말은 대체로 직관적이다. 부엌에서는 음식이 한창 완성되고 있었다. 거의 다 구워진 빵 냄새가 뇌까지 파고들 기세로 따뜻했다. 창문 바깥의 차갑고 어두운 바람은 한 점도 끼어들지 못하는 온화한 향이었다.
“온실까지 보고 온 거야?”
“으응. 당신 좋아하는 커피콩도 잔뜩 따놨지.”
칭찬을 바라는 응석을 부리면서 허리춤에 냉큼 안겨드는 와이프의 머리카락 위로 성실하게 입 맞추는 것은 펠리에 씨의 오래된 즐거움이다. 잘했네, 하는 말까지 붙여두면 헬렌은 만족한 고양이처럼 귀여운 소리를 낸다.
“마침 잘 왔다. 오븐에 넣어둔 거 한 금방 다 되거든. 타이머 보이지? 좀 꺼내주고 갈래.”
“응, 일 분 좀 남았네. 지금은 뭐 하려고?”
“과자를 좀.”
“애들 와도 별 거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웃겨. 나한텐 맨날 애들 다 컸다고 잔소리하면서.”
“밖에 눈 오던데 우산 쓰고 나갔어?”
불리해지면 노골적으로 화제를 비튼다. 젊을 땐 퍽 짜증나는 구석이기도 했는데 이제 와선 좀 귀엽나. 헬렌은 킬킬 웃으면서 펠리에 씨의 어깨 근처에 뺨을 붙였다.
애들이 어릴 땐 별 수 없이 조리대 위가 퍽 어수선했는데 이제는 둘이 사는 단촐한 살림이고, 헬렌은 별 관심이 없는 구석이라서 간소해졌다. 지금 올라와 있는 것도 펠리에 씨가 순서에 맞춰 세워둔 것 같은 재료들이 든 봉투와 원통형의 유리병, 그리고 보울 두 개가 다였다. 그 중 하나에서는 버터가 주걱으로 젓는 대로 천천히 녹고 있었다.
“그 정도로 뭘. 요 앞인데 뛰어갔다 왔지.”
잔소리가 뻔해서 얼른 덧붙인다.
“나 감기 안 걸리는 거 알잖아.”
변명이 적시에 들어갔는지 펠리에 씨는 한숨만 얕게 내쉬고 말았다. ‘당신도 이제 마냥 젊지 않다는 거 알잖아, 나 좀 속상하게 하지 마.’ 대충 그런 말을 한숨에 삼킨 게 분명했다.
다행히 더 혼나기 전에 타이머가 삑, 하고 울렸다. 헬렌은 한달음에 오븐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따뜻한 수증기와 함께 달콤한 냄새가 후끈하게 퍼졌다.
“장갑! 헬렌.”
“내가 앤줄 아나.”
헬렌은 장갑을 잊었으면서도 입을 댓발은 내밀고 투덜거렸다. 복수해야지. 트레이를 올려두고, 장갑을 벗어두고, 펠리에 씨의 뒤를 돌아서 슬금슬금 다가선다. 수상한 기색을 감지한 펠리에 씨가 뒤를 돌아봤을 땐 이미 한 발 늦었다. 헬렌은 버터 그릇에 손가락을 푹 찍어넣은 뒤 쪽 빨면서 줄행랑쳤다.
뒤에서 펠리에 씨가 ‘애잖아.’ 하고 슬쩍 열 받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래도 웃음기가 희미하게 묻어났기 때문에 헬렌이 겁 먹을 이유는 그다지 없었다.
2. 실온에 두었던 달걀을 풀면서 바닐라 익스트랙을 넣어주세요
그도 그럴게, 이 도둑 손가락은 유구한 가족만의 전통이나 다름없다.
주로 어린 크리스가 하던 짓이었다. 펠리에 씨의 눈을 피해서 버터와 설탕 섞은 것을 매번 몰래 손가락을 찍어 먹었다. 그리고 매번 들켜서 흠씬 혼쭐이 났고, 시무룩한 얼굴로 얌전히 달걀을 풀고 있으면 제때 바닐라 익스트랙을 넣을 것을 명령받은 권태혁이 조그만 통을 조그만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가 ‘그러니까 하지 말라니까.’ 하고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어린애 나름의 위로였는데 크리스가 그걸 곧이곧대로 듣진 않았고 ‘그러니까 너도 같이 했으면 덜 혼났잖아. 너만 말 잘 듣고 이게 뭐야.’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펠리에 씨의 동향을 몰래 눈치 봤다. 잠깐 지하실에 내려가기라도 하면 검지 손가락에 가득 달고 느끼한 걸 묻히고선 입 안에 넣고 빨았다. 펠리에 씨의 혼내는 눈빛에서만 벗어나면 금방 사고를 칠 생각에 기가 살았다.
“역시 내 딸이라니까.”
권태혁 옆에서 어린애들의 감시를 명령받았던 헬렌은 충성스러울 의향이라곤 하나 없는 기색으로 킬킬 웃기만 했다.
“역시 헬렌도 먹고 싶은 거지?”
“그럼.”
“크리스가 망 봐줄게. 헬렌도 한 입 해.”
“어쭈. 꼬마가 맹랑해, 아주.”
“얼른!”
권태혁만 불안한 눈짓으로 지하실을 지켜보고 있었고, 크리스는 헬렌과 마찬가지로 망을 보는 데는 영 재능이 없었다. 헬렌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설탕이 가득 묻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닦고 낼름 먹는 걸 보는 데에 정신이 다 팔려 있었다.
그러니까 현장이 발각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펠리에 씨는 별 쓸데없고 비위생적인 작당모의를 해치운 와이프와 딸을 쳐다보며 눈썹을 비틀었다. 눈이 마주친 권태혁에게는 쉿, 하고 검지를 세웠다. 권태혁은 종종 그렇듯 잘못한 거라곤 두 여자를 말리지 못한 죄밖에 없으면서도 목이 조금 움츠러들면서 순종했다.
“헬렌. 당신은 애를 말리지 못할 망정 같이 사고를 쳐?”
헬렌은 현장이 발각된다고 당황할 여자가 아니다. 오랜 세월 모든 사건 현장을 뻔뻔하게 뭉개왔다.
“그런 내가 좋지? 자극이 막 되지?”
“뭐라고?”
“솔직해져야지, 펠리에. 당신은 내가 사고 치면 수습해주는 거 좋아하잖아. 나 다 알아.”
“맞아! 펠리에 씨는 맨날 헬렌이 사고 치면 수습해주는 거 좋아하잖아! 크리스도 다 알아!”
냉큼 헬렌의 등 뒤에 숨어서 옷자락을 움켜쥔 채 크리스가 항변했다.
“기가 막혀. 애 배우는 것 좀 봐. 당신 말 좀 제대로 하라고 그렇게 얘길 해도.”
“난 틀린 거 없이 말 잘 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이 잘못한 건 없고 전부 다 잘했다고?”
헬렌의 눈이 슬쩍 펠리에 씨를 훑었다. 음, 어쩌면 정말로 조금은 짜증이 났는지도.
“당신이 해놔서 그런지 아주 맛있었어.”
한껏 귀엽게 웃으면 펠리에 씨의 사기가 미묘하게 떨어진다. 헬렌이 웃는 눈주름이 좀 더 깊어진다.
“그래서 못 참고 계속 먹었지 뭐야…….”
크리스도 아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펠리에 씨는 내심, 아주 웃기고 어이없는 웬수들이라고 생각한다. 짜증이 살짝 남은 척 한숨을 내어쉬고, 두 사람을 집 밖으로 내쫓으며 눈사람이라도 만들어 두라고 명령한다. 크리스는 좀 더 훔쳐먹고 싶었는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조리대와 앞치마를 붙잡고 가엽게 징징거렸지만 헬렌이 제때 애를 옆구리에 끼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
펠리에 씨는 한숨을 한번 더 깊게 내쉰다.
“이제 좀 조용하다, 그렇지 않냐.”
“네…….”
“넌 안 말리고 뭐했어?”
펠리에 씨가 권태혁에게 말하는 투는 아주 부드러운 놀림에 가까웠다. 그래서 권태혁도 얌전히 머쓱한 미소만 짓고 말았다. 그래도 계란은 잘 풀어뒀네. 힘 좋은 것들 여기다 쓰지, 어디다 쓰냐. 권태혁은 한번 더 머쓱한 미소를 지은 뒤 바닐라 익스트랙을 적정량 넣는다.
3. (1)에 (2)를 나눠 넣으며 충분히 섞어주세요
펠리에 씨와 헬렌은 얼핏 보아서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어린 커플이었다. 펠리에 씨는 몹시 모범적인 수석생이었으며 헬렌은 일찍부터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꼬마 갱이었다. 밤 늦게 도서관에서 귀가하던 펠리에 씨가 헬렌을 먼저 발견했다. 후진 방 하나짜리 스튜디오가 있는 건물은 꼴에 예전에는 위엄이 있으신 건물이었기에 입구에 높이가 좀 되는 계단이 있었다. 거기에 헬렌이 혼자 앉아 있었는데, 가로등 아래에서 본 멍이며 핏자국이 심상치 않았고 게다가 꽤 취향의 얼굴이었다. 못 본 척 계단을 다 올라간 뒤에야 뒤돌아 보았다. 후드를 푹 덮어쓴 등이 생각보다 조그맸다.
올라올래?
뭐가 있는데?
약, 그리고 스튜 조금. 빵과, 어쩌면 술도.
헬렌은 가만히 바닥만 내려다보다가, 문득 몸을 돌려서 펠리에 씨를 돌아보았다. 후드가 눈썹까지 덮고 그림자가 져서 펠리에 씨에게는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왠지 초조해질 즈음에 헬렌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일어나서 말없이 계단을 올라왔다.
펠리에 씨는 헬렌이 근처까지 오길 기다렸다가 말없이 앞서 남은 계단을 올랐다. 뒤따라 오는 발소리를 들으면서 어쩌면 내일 아침에 집이 발칵 뒤집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귀중품이라곤 책이 다였는데, 무슨 책이 비싼지 같은 걸 알 만한 애는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저 애가 잠들면 무슨 표정일지가 조금쯤 궁금했다. 무슨 길고양이를 집 안으로 꼬드기는 기분이었다. 크게 다르지 않기도 했고.
그대로 어설프고 자연스럽게 넝쿨처럼 삶이 얽혀 들었다.
헬렌은 종종 그 계단에서 펠리에 씨를 기다렸다. 그러면 같이 집으로 올라갔다. 헬렌에게 여벌 열쇠를 줬다. 새벽이 한참 깊어서 집에 돌아오면 가끔 헬렌이 쿨쿨 잠든 채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어느새 키스했다. 사랑한다는 말이 저절로 새어나왔다. 문장이 또렷한 음성으로 발음되고서야 깊게 깨닫는다. 그래, 실은 처음부터 그랬구나. 열띤 헬렌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웃는다. 자주 불같이 싸우면서도 헤어질 수는 없었다. 헬렌의 온도를, 체취를, 뾰족한 말투와 거친 머리카락을 지독하게 사랑했다. 영혼이 거기에 다 매여버렸다. 마음을 이미 다 써버려서 다른 삶을 상상할 순 없었다.
그러니 부디 결혼 반지를 받아주길 청한다.
새하얀 웨딩 드레스에 파묻힌 채 그보다도 하얗게 미소 짓는 헬렌을 안아 올리고 새로운 집의 문지방을 넘는다. 나날이 너무도 즐겁고 행복한 나머지 아내가 된 헬렌을 매번 그런 식으로 치료하는 게 조금씩 끔찍해졌다.
헬렌, 당신 이제 그런 일 안 해도 되잖아. 내가 자리 잡았으니까. 위험하게 굴지 않으면 좋겠어.
그런 일이 뭔데?
알잖아.
너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난 숨막혀. 숨이 막힌다고. 알겠어?
당신 생각해서 하는 말인 거 알면서 왜 그렇게 꼬아 들어.
난 몰라. 모르겠다고. 펠리에. 넌 왜 자꾸 그런 말을 해?
비슷한 대화가 자주 변주되었다. 누구도 의식적으로 그런 건 아니었는데, 여전히 같은 집에 살았지만 깨어있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그사이 펠리에 씨는 응급실에서 정식으로 근무를 시작했고 대중 없이 집에 돌아왔다. 헬렌은 도둑 고양이처럼 새벽에 집에 들렀다. 어쩌면 우린 이대로 헤어지는 걸까. 신새벽에 침대에서 혼자 잠들어 있던 헬렌의 얼굴을 겨우 발견하고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갈비뼈 속의 무른 살이 붉게 베이는 것처럼 서늘했다.
어떤 새벽에는 당신의 이런 얼굴을 발견하고 아주 행복하게 웃을 수 있었는데.
4. 박력분, 아몬드 파우더, 시나몬, 진저를 가지런히 체에 쳐서 넣어주세요
“애들 늦는대. 눈 때문에 길 막혀서.”
뒤를 돌아보자 헬렌이 부엌으로 들어오는 문간에 서서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게? 물어볼게.”
헬렌이 핸드폰을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했다. 전화기 너머는 캐롤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크리스, 일단 노래 꺼라.”
- 아, 쫌.
“전화할 때 예의라고 몇 번을 말해.”
- 펠리에 씨랑 헬렌이니까 안 끈 거라고.
“예외 없어.”
- 제가 끌게요.
- 권태혁!
“시끄러워.”
- 맨날 시끄럽대!
- 네가 시끄럽긴 해, 크리스. 그리고 나도 캐롤 끄고 싶다고 계속 말했잖아. 네가 한 달 전부터 틀어서.
- 맨날 나만 뭐라하고!
“실망하지 마, 크리스. 너희가 떠난 뒤로 이 집에서 잔소리 듣는 걸 담당하는 건 나니까.”
헬렌이 얄밉게 일러바치는 얼굴을 하며 펠리에 씨를 놀리듯 쳐다봤다. 아, 정신 사나워. 펠리에 씨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스피커폰의 목적을 상기하기 위해 잠시 천장을 노려봐야 했다.
“됐어. 그만. 그래서 언제쯤 도착할 것 같아?”
- 저도 잘 모르겠어요, 펠리에 씨.
- 네비는 한시간만 더 가면 된다고 하긴 하는데, 십오분 전에도 한시간 남았다고 했거든.
“지금은 어딘데?”
평소라면 3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펠리에 씨는 날씨를 가늠하곤 대강 알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으라고도 했다. 대개 그렇듯이, 쉽지 않았고 몹시 시끄러웠고 열도 좀 받는 대화가 10분 정도 더 이어졌다. 마침내 전화가 끊긴 후에는 귀가 멍할 정도로 집이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냥 오지 말라고 할까……. 펠리에씨는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다 사용한 체를 설거지 통에 집어넣었다.
5. 가루가 보이지 않게 되면 손으로 천천히 뭉쳐주세요
헬렌의 얼굴을 봐도 끔찍했고, 보지 못해도 끔찍했다. 그 즈음 이미 연락을 끊은지 오래된 고향에서 편지가 왔다. 낡은 고향 집과 그 부지를 돌볼 사람이 없어서 매각할 예정인데 동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냉장고에 집을 비운다는 쪽지를 붙일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이틀 안에 들어올 예정이었고 그 정도는 일이 바쁘면 종종 비우곤 했다. 예전에는 그래도 꼬박꼬박 연락을 하면서 지금 뭘 한다, 보고 싶다, 너는 뭘 하냐, 시시콜콜 말했던 것 같은데 삶이 피곤하고 지쳐서인지 더는 그러지 않게 되었다.
딱히 누굴 보고 싶은 건 아니어서 조용히 낡은 기억 속의 땅을 걸었다. 뒤로 산을 끼고 앞으로도 숲을 낀 외진 집이었다. 하지만 그 잠깐은 부드러운 능선의 언덕과 조그만 연못들이 충분히 자리 잡고 있는 들이었다. 집도 헛간도 모두 겉은 제법 황폐해 보였지만 안은 멀쩡했다. 애초에 잘 지어진 집이었다. 무덤에 조문을 오는 기분으로 들린 고향이었는데, 펠리에 씨는 느긋하게 혼자 걸으면서 오랜만에 숨이 쉬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헬렌을 데려오고 싶었다.
어쩌면 여기라면 함께 숨을 쉴 수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오래된 땅에 힘껏 발을 디디며 제게로 달려오는 헬렌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 헬렌, 할 말이 있어. 집에 오는 날을 알려줘.
- 사랑해.
오랜만에 문자를 남겼다.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6. 반죽을 냉동에 한 시간 이상 휴지시켜 주세요
집을 수리하느라 자주 내려왔다. 처음에는 별장 정도로 쓰려고 했는데, 여러모로 운이 따랐다. 가벼운 여행을 가는 기분으로 함께 내려오던 헬렌이 이 촌마을에 있는 수상한 광산에 재미를 붙였다. 산 속에 나오는 작은 짐승들을 사냥하는 데에도. 마을에 오래 상주하며 살았던 의사가 때를 맞춰 은퇴했다.
펠리에, 거기로 아주 가고 싶은 거 아니야?
헬렌이 선선한 얼굴로 물어왔다. 펠리에 씨는 다시 조심스럽게 손을 잡게 된 아내의 표정을 살폈다.
나, 거기도 좋아. 꽤 마음에 들어.
당신 일 그만두는 거 싫어했잖아.
조금 고집스럽게 말하고 말았다. 헬렌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랬지. 그런데 거기 있을 때 네 얼굴이 훨씬 편해보여. 나도 괜찮을 것 같아.
같이 가줄 거야?
망설이며 묻는 말에, 헬렌은 그럼 감히 날 두고 가려고 했어, 하고 장난스럽게 을렀다.
처음 차렸던 신혼집에는 각종 가전이며 가구를 들였지만 새 집에는 옷과 책만 싸들고 갔다. 헬렌이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수상쩍은 작은 트렁크가 하나 있었는데, 펠리에 씨는 그 안에 불법적인 무기가 가득할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짐을 은밀하게 부쳐주는 데에나 신경을 썼다. 윤리나 도덕 같은 것들이 오랫동안 펠리에 씨를 움직여온 축이었지만 헬렌을 제대로 사랑하고 즐기기 위해서 돌아가는 축은 따로 있었다. 낭만이라고.
두번째 신혼을 느긋하게 즐겼다. 헬렌은 늦어도 새벽 두 시까지 집에 돌아왔다. 펠리에 씨는 헬렌이 궂은 날에 산을 오르거나 하면 웬만해선 꼭 따라갔다. 하루종일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춤만 추기도 했다. 조그만 마을의 모든 계절과 모든 축제를 즐겼다. 사진을 많이 남겼다. 두 사람의 이름을 한데 묶어서 기억하는 마을 사람들과 친숙해졌다.
그 모든 일이 의심할 바 없는 일상이 되어갈 즈음에 기묘한 충동이 들었다.
“헬렌, 궁금한 게 있는데. 당신, 애들과 지내본 적 있어?”
“없어.”
헬렌은 곧장 대답해놓곤 의아한 투로 덧붙였다.
“그거 어렵나?”
그건 모르겠고, 내 마음은 좀 어려워진다.
펠리에 씨는 슬며시 마음 속에 들어차던 ‘본인을 꼭 닮은 애와 나란히 엎어져 잠든 헬렌’을 상상하는 걸 멈췄다. 하긴, 사람 패면서 비명 소리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여자와 육아를 한다는 게 그다지 좋은 생각은 아니겠지…….
참으로 지당한 생각을 했는데도, 결국은 그런 짓을 하고 말았다. 헬렌을 꽤나 닮았지만 겁이 많은 여자애와 조용하고 수줍고 다정한 남자애를 입양해서 길렀다. 여자애는 헬렌 덕분에 좋아서든 무서워서든 비명을 많이 질렀지만 어쨌든 사랑이 지나치게 넘치는 어른으로 자라났고 남자애는 기 센 세 여자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조용히 선한 고집을 키워서 점잖은 어른이 되어주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잠든 모습만은 무척 평화로웠다. 펠리에 씨는 세 사람에게 차례차례 담요를 덮어주고 근처에 앉아 책을 읽으면서 종종 그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전혀 닮지 않은 얼굴들이 똑같은 표정으로 잠들어 있어서 자꾸 무심코 웃었다.
7. 쿠키 커터로 모양을 냅니다
“이제 해도 돼?!”
들뜬 크리스가 소리를 꽥 질렀다. 펠리에 씨는 익숙하게 미간을 좁힌 뒤 차분하게 답한다.
“그래. 그런데 손은 씻었냐.”
“아, 흠. 흠. 크리스 인제 손 씻으려고 했지. 펠리에 씨 어떻게 알고 물어봤지? 아주 딱 완전 좋은 타이밍이었어.”
“말은 잘한다.”
권태혁은 이미 사람 모양의 쿠키 커터를 손에 들고 신중하게 찍을 자리를 고르고 있었다. 슬쩍 그 뒤로 다가선 헬렌이 권태혁의 어깨를 쳐서 커터가 납작하게 편 반죽에 쿡 찍히게 만들었다.
“헬렌.”
“일부러 안 그랬어. 실수. 미안, 혁아.”
권태혁은 얌전한 애라서 조금 침울해지기만 했다. 헬렌은 ‘실수, 미안.’이라고 말해놓고도 권태혁의 등 뒤에서 펠리에 씨에게 몰래 ‘노잼, 얘 비명 안 지른다.’ 얼굴을 지어 보였다. 펠리에 씨는 헬렌에게 한쪽 눈썹을 힘껏 치켜 올리면서 권태혁의 어깨를 손에 느슨하게 쥐고 토닥였다. 반죽 정리해줄까. 애는 얌전히 고개를 저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아아, 나도 손 씻어야겠다. 손. 크리스, 다 했냐?”
“응!”
“잘했다, 아이 잘했다.”
크리스는 눈치 없이 히히 웃으며 헬렌에게 싱크대 자리를 비켜주었다. 바지에 지저분한 눈 얼룩이 잔뜩 묻어서 펠리에 씨는 잠시 애를 붙잡고 털어주었다. 둘이서 실컷 체력을 빼고 온 모양이어서 그건 다행이었다.
“펠리에 씨, 근데 이거 진짜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상자로 바꿔주셔?”
“……그래.”
“왜?”
“원래 그런 분이셔.”
펠리에 씨는 육아에 있어서 헬렌의 성정만을 걱정했지만 정작 애들을 키워보니 걱정할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본인도 동심 같은 것과는 지나치게 멀었다.
다행히 그건 헬렌이 채워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애들과 나란히 조리대에 선 헬렌이 깔깔 웃으며 제 몫의 반죽을 납작하게 밀기 시작했다.
“우유랑 쿠키를 무진장 좋아하는 양반이거든. 나 먹으라고 이걸 준비해둔 걸 보니 이 집에는 착한 꼬맹이들이 사는 게 틀림없구만, 하고 서비스로 주고 가시는 거지.”
“그럼 크리스 올해 많이 울고 나쁜 어린이였어도 이거 두면 산타 할아버지한테 선물 받을 수 있는 거야?”
“그럼~ 물론이지.”
“그럼 크리스 쿠키랑 우유 열개씩 두면 안돼?”
“산타 영감이 이 녀석! 욕심 많은 어린이구만! 어림도 없다! 할 걸?”
“그건 안 되지. 산타 할아버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니까 단 거 너무 많이 드시지 말라구 하나씩만 둬야겠다.”
“누구 닮아서 말도 잘하고 머리도 잘 돌아가나 몰라, 우리 꼬맹이.”
“그야 물론 헬렌 닮아서 그렇지.”
“눈치도 빨라. 아유, 잘났어.”
“크리스 너무너무 귀엽다고도 해줘.”
“그야 물론 귀엽지.”
“히히.”
아주 쿵짝이 잘 맞다. 수다 떠는데 정신이 팔려서 헬렌이 밀던 반죽은 숫제 종잇장처럼 얇아졌다. 펠리에 씨는 익숙한 한숨을 내쉬며 그 반죽을 받아다 정리해주었다. 헬렌은 익숙하게 귀여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해결된 마냥 굴면서 크리스의 입에 몰래 초코 칩을 넣어주었다.
“그럴 거면 권태혁도 먹여줘라.”
“아.”
헬렌은 냉큼 초코 칩을 들이댔다. 권태혁은 쭈뼛대며 허락을 구하듯 펠리에 씨를 다시 쳐다보았다.
“싫어?”
“그런 건 아닌데요…….”
크리스가 딴에는 몰래 권태혁을 팔꿈치로 쿡 찌르고 얼른 먹어! 하고 속삭였다. 물론 펠리에 씨와 헬렌에게 훤히 들리는 귓속말이었다. 권태혁은 그제야 쭈뼛거리며 입을 열고 초코 칩을 받아먹었다.
“자, 이제 약탈은 그만들 해라. 다 만들고 남은 건 먹어도 되니까. 너네 그렇게 먹다가 쿠키한테 달아줄 눈이고 단추고 모조리 없어지겠다.”
“쿠키는 옷 안 입어도 될 것 같아, 펠리에 씨. 쿠키잖아.”
“헛수작 부리지 마라, 크리스.”
“애 말에 일리가 있네.”
“헬렌.”
“하지만 역시 할 일을 다 하고 먹는 초코가 제일 맛있겠지, 크리스?”
능숙하게 태세를 전환하는 헬렌을 빤히 바라본 크리스가 새침하게 대꾸했다.
“헬렌은 날 닮아서 머리가 너무 잘 돌아가.”
헬렌은 낄낄거렸고, 펠리에 씨는 애를 어디서부터 다시 훈육할지 가늠하기 시작했고, 권태혁은 어른들을 흘끔 쳐다본 뒤에 다시 반죽을 커터로 자르는 데에나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8. 오븐에서 충분히 구워주세요
오븐이 삑, 하고 울었다.
애들은 커터를 이것저것 바꿔가면서 두번째 쿠키 반죽을 자르면서 놀고 있었다. 크리스는 자기 트레이에 공룡을 찍어낸 뒤 운석을 만들고 있었고 권태혁은 솔방울의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 가는 자국을 내고 있었다. 헬렌은 애들의 작품을 농담조로 품평하면서 펠리에 씨 몰래 이런저런 자잘한 간식들을 애들의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딸기잼을 뜬 스푼이 애들의 입에 날름날름 먹여지고도 다시 은근슬쩍 잼 병으로 들어가는 불상사가 잇달았지만 크리스마스니까 펠리에 씨도 눈 감아 주기로 했다. 어차피 저대로라면 오늘 안에 다 먹을 것 같기도 했다.
다 구워진 쿠키 트레이를 꺼낸다. 달콤한 시나몬 냄새가 부엌 안에 가득 찼다. 식히려고 조리대로 가져오는데, 헬렌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뜨거워!”
펠리에 씨가 경고하든 말든, 헬렌은 냉큼 집은 쿠키를 냉큼 한 입 깨물었다. 기분 좋게 파사삭,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거 맛있다. 혁이가 만들어서 그런가?”
권태혁의 표정이 살짝 혼란스럽게 밝아졌다. 펠리에 씨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아서, 펠리에 씨는 내심 기가 막혔다. 얘, 지금 내가 화 더 못 내게 하려고 권태혁 칭찬한 거지?
“그거 헬렌 꺼 해.”
“뭐어? 이건 너야, 크리스.”
“아니야. 헬렌이 먹었잖아. 헬렌 쿠키로 해야지.”
“아니지. 크리스 네가 쪼끄맣잖아. 한입 먹어서 쬐끄매졌으니까 이건 너지.”
“아니지. 헬렌이 책임져야지.”
“아니지.”
헬렌과 크리스가 또다시 정신 연령이 잘 맞는 말다툼으로 넘어갔다. 권태혁은 쿠키가 정말 맛있게 잘 되었는지 알고 싶은 눈치로 펠리에 씨가 들고 있는 트레이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뺨과 귓가가 조금 상기되어서 희미하게 붉었다. 그 모양이 우습고 귀여워서 펠리에 씨는 좀 웃었다. 작은 나무 모양의 쿠키 하나를 충분히 식혀서 권태혁에게 건넸다.
“자. 네가 맛봐라. 네가 제일 잘하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으니까.”
“잠깐만, 크리스는! 크리스도 열심히 했어!”
항의하는 크리스에게는 헬렌이 똑같은 쿠키를 집어주었다. 어린애 둘이서 갓 구운 작은 쿠키 하나를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헬렌과 펠리에 씨는 거의 동시에 실소했다. 그러고 눈이 마주치자 헬렌이 눈을 찡긋, 한다. 펠리에 씨는 다시 한번 조금 더 진하게 웃고 말았다. 매일매일이 시끄럽고 즐거웠다. 헬렌이, 헬렌과 점점 더 단단히 얽혀가는 삶이 사랑스러웠다.
9. 원하는 대로 꾸며주세요
“우와~ 도착이라는 걸 하기는 하네.”
“눈길에 고생했다.”
“펠리에 씨, 이거 선물이에요. 올해 크리스마스.”
“가져오지 말라니까.”
“펠리에 씨, 그런 말 하면 요즘 애들은 ‘그래? 그러면 다시 가져가야겠다.’ 이런다?”
“가져가라.”
“역시 펠리에 씨는 가차없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크리스는 깔깔 웃으면서 자기 키만큼 기나긴 목도리를 차근차근 풀어제꼈다.
“크리스, 장난치지 마. 펠리에 씨, 이거 화분이에요. 좋아하실 것 같아서. 공방에 사러갔는데 잔도 괜찮은 게 있어서 헬렌 몫으로 같이 담았어요.”
권태혁이 이제는 그다지 당황하지 않게 된 침착한 태도로 선물을 건넸다. 펠리에 씨는 마지 못한 듯 꽤 묵직한 상자를 받아들며 퉁명스럽게 ‘고맙다.’고 답했다.
“펠리에는 참 그대로지?”
헬렌이 감상에 젖기라도 한 것 같은 눈을 하고서 거실로 슬슬 나왔다. 그게 하도 어울리지 않아서 크리스는 인사하기 전에 박장대소부터 했다.
“아, 그럼. 그럼. 진짜 다 그대로다. 맨날 올 때마다 아무것도 안 바뀐 것 같아. 둘이서 이것저것 손댄 건 알겠는데도.”
“집이니까 그렇지.”
“아~ 맞지. 집이니까.”
크리스와 헬렌이 시끌벅적해졌다. 도시에서의 생활을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으며 소파에 앉은 크리스의 긴 머리카락을 소파 등받이 위에 걸터앉은 헬렌이 개를 쓰다듬듯 쓰다듬기 시작했다. 펠리에 씨는 받은 선물을 내려두러 부엌 뒤로 넘어갔고, 권태혁이 천천히 따라왔다. 부엌에서는 한창 요리가 막바지였다. 기분 좋은 만찬의 냄새 밑으로 은은한 시나몬 냄새가 풍겼다. 올해도 펠리에 씨가 진저맨 쿠키를 구워둔 모양이었다. 저녁 식사를 하게 되면 으레 그렇듯 쿠키를 하나씩 제 것으로 꾸미겠지.
권태혁은 익숙하게 오븐 옆에 붙어있는 타이머를 읽었다.
“펠리에 씨, 오븐에 든 거 꺼내 둘까요?”
“아니. 됐다. 그거 끝나면 식사할 예정이니까 쟤들 손 씻겨서 앉혀놔. 너도 옷 좀 풀고.”
“네.”
“운전 고생했다. 쟤도.”
“아뇨, 뭘.”
제법 무뚝뚝한 대화였지만 펠리에 씨가 말하는 ‘고생했다.’가 얼마나 진심인지는 권태혁도 알았다. 집안의 골칫거리를 각자 한명씩 맡고 있는 처지라 오래된 전우애가 있었다. 공모자의 미소를 조용히 교환한다.
머지 않아 오븐은 조리 완료의 경쾌한 ‘띵’ 소리를 냈다. 식탁에는 네 가족이 모두 둘러앉았다. 애들을 도시로 독립시킨지도 몇년째였다. 헬렌과 단둘이 보내는 생활이 가장 사랑스러운 건 지고한 사실이었지만 넷이서 지내는 꽉 찬 시끌벅적함이 때때로 그리운 것도 사실이었다. 쉴새없는 농담과 꾸짖음, 은밀한 미소와 눈짓이 오간다. 이제는 모두 술로 차게 된 잔 네 개를 든다.
10. 완성!
메리 크리스마스 이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