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로 장지문이 달린 복도, 다다미 열 장 남짓의 방, 탁자마다 준비된 화로. 손님을 기다리는 정갈한 공간. 그러나 숯과 열기가 사라진 방 안의 공기는 서늘했다. 복도를 따라 다른 방과 중정을 둘러보아도 사람의 흔적은 찾기 어려웠다. 방금까지 부엌에서 나온 요리가 오감을 자극하고 시끌벅적한 대화로 활기를 띄었던 식당이 돌연 빈 집이 되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차라리 돌아갔다고 할까. 나기는 눈 앞의 아이를 내려다 보며 한숨을 삼켰다. 제 눈치를 살피는 어린아이 앞에서는 곤란한 기색을 비치고 싶지 않았지만 한 가지 물음이 머릿속을 채웠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12월 28일. 관공서와 대형 슈퍼마켓이 연말을 맞이해 휴무를 내걸 즈음. 나기의 퇴원은 다른 가족보다 며칠이 늦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추가 검진을 받고 재활 치료 예약을 점검하고서야 하루나 일가는 입원실을 떠났다. 유리창에 아물어가는 흉터가 보였다. 통증은 가신지 오래였고 자연광 안에서도 선명하게 사물이 비쳤다. 그러니 처방전과 약 봉투는 가족을 안심시키려는 선택이었다. 사람에 따라 내보이는 영역을 구분하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가령 병실을 떠날 때까지 한 뼘 열려 있던 침대맡 창문은 우연 취급했다.

하루나 가는 현대의 전형적인 핵가족이다. 성인이 되어 분가한 세 자식과 부부가 동시에 모이려면 마땅한 동기가 필요했다. 어머니의 생일, 오봉, 정월. 회사가 일찌감치 직원들에게 연휴를 나눠주는 연말마다 나기는 유년기를 보낸 방으로 돌아왔다. 입원 기간을 늘렸던 것과 비슷한 사유였다. 일 년에 이삼일을 투자해 집에 머무르면 잠시나마 어머니를 안심시킬 수 있으므로. 올해는 밖으로 나돌 기분도 아니라 병원에서 본가로 직행해 하루를 더 쉬기로 하였다. 나기는 차에 짐을 실으며 동생을 돌아보았다.

"신지."

"ㄴ, 네?"

"너도 집에 가지 그러니."

"…괜찮을까요? 아니, 싫은 건 아니지만."

흰 눈동자가 왼쪽으로 굴렀다. 가리키는 방향에서 유지가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데릴사위인 그는 토가이의 피를 받고 태어난 남자들처럼 푸른 눈동자를 가졌고 소우도 그 색을 꼭 닮아 있었다. 가장과 맏이가 자주색을 공유하는 가운데 바삐 굴러가는 알사탕처럼 하얀 빛깔.

"어차피 내일 다시 만나잖아."

거긴 오랫동안 네 방이었는데. 자기 방에 초대 받았다고 기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래서 네 명 모두 차에 올랐다. 부친의 표정이 일그러지면 며칠 전 혼자 귀가한 둘째보다 낫지 않느냐고 받아칠 요량이었으나, 유지가 택한 방식은 함구였다. 다섯 명이 모인 집 안을 정적이 채웠다. 이 상황에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않는 하루나만 가끔 입을 열었다. 무관심에서 시작된 담소는 몇 마디 이어지지 않고 텔레비전 소리에 파묻혔다.

밤을 넘기면서 다소 마음을 가다듬었는지 이른 아침 차를 내리던 유지는 한결 표정이 나았다. 가족이 모두 모여 스끼야끼를 먹으러 가는 연년 행사에 무게를 잡기도 우습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부모와 형제의 반응을 살피던 신지의 얼굴도 조금 풀어졌다. 전날은 방에 틀어박혔던 소우가 망가진 생활 패턴으로 하품을 쩍쩍 하며 끌려나온 덕택이기도 했다.

미리 예약한 식당은 전통 가옥을 개조해 만든 고즈넉한 이층집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현관으로 가는 동안 돌멩이 사이로 금붕어가 헤엄쳤다. 연못 가장자리에서 수류가 쏟아지는 죽통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기모노를 차려 입은 종업원이 깍듯한 태도로 가족을 가장 깊은 방으로 안내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인원수대로 세트?"

"야채 추가하자."

"세트 메뉴는 음료와 디저트를 골라 주세요. 오늘 차림상은…"

빛깔 고운 예시 사진을 넘기던 손이 멈췄다. 메뉴판 사이의 붉은 종이로 시선이 향했다. 힐끗 앞 사람을 보면 건너편 메뉴판은 평범했다. 부드러운 질감의 종이를 펼쳐 나온 문구를 읽을 때만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좋은 음식은 추억을 만듭니다.'

'좋은 음식은 추억을 불러일으킵니다.'

'좋은 재료는 마음의 양식입니다.'

'마음의 양식은 좋은 재료입니다.'

다소 길지만 훈훈한 캐치프레이즈. 정월 맞이의 광고인가. 나기는 쪽지를 접고 제 몫의 디저트를 정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훅 하고 찬 공기가 코 끝에 스쳤다. 어느새 주위는 텅 비어 있었다. 발신 불명의 쪽지만 손 안에서 바스락거렸다.

"얘."

"핫. 네, ……나기."

'방금 이름 헷갈렸지.'

복도를 돌고 계단을 오르며 가족들을 찾다가 인기척을 따라 부엌에 이르렀다. 상황을 설명할 종업원 대신 어린아이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늘색 눈동자는 렌즈고 넘겨 받았을 아라야의 옷은 조금 컸다. '무엇보다 얼굴이 생판 남이잖아.' 지금은 답을 아니까 눈에 띌지도 모르겠지만 부친의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자신을 빤히 내려보던 사람이 갑자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자 어린 눈초리가 다시금 바쁘게 굴렀다. 웃음을 참고 있다는 건 눈치 못 챈 것 같다. 왠지 맥이 빠졌다.

"너 신지가 아니구나."

"………네?" '망했다.'

"맞으면 작년 생일에 뭘 받았는지 대답해 보렴."

아마 자신이 선물했겠지만. 십 년도 넘은 선물 따위 잊은지 오래다. 속였다는 보복조차 아닌 가벼운 장난에 얼굴이 하얘지자 나기 쪽에서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걱정 마. 사에코 님께 얘기 들었어."

"헉, 다, 다행…… 깜짝 놀랐어요."

"쫓겨날까봐?"

"……."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고?!'

"왜 널 내보내겠어. 도망간 녀석에게 꾸지람을 늘여놓은다면 모를까."

신지도 아라야를 희한하게 여겼던 탓에 수긍이 빨랐다. 다시 주방을 둘러보자 의외로 가스나 수도, 전기는 멀쩡했다. 전화는 먹통이지만 담장 너머로 평범한 거리가 내다 보이는 경험이 벌써 두 번째다. 이번에도 나기는 굳이 바깥으로 나서기보단 안에서 방법을 찾기로 했다. 작은 꼬르륵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핫. 죄송해요."

"…아, 그러네. 식사할 시간이지."

상황을 모르기로서는 피차일반. 두 사람 모두 연말 가족 식사로 식당을 찾았으니 아침에 간단하게 요기만 하고 줄곧 공복이었다. 나도 배고팠으니 걱정 말란 핑계로 나기는 냉장고를 열었다. 표면이 매끄러운 계란 한 판에 아까와 같은 재질의 붉은 쪽지가 올려져 있었다.

'맛있는 스끼야끼를 만드는 법!'

'추억을 모아 한 솥에 넣고 끓입니다.'

'재료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화기 사용에 주의하세요.'

재료: 달걀, 대파, 양파, 곤약, 소고기, 두부, 버섯

물과 간장, 소스류는 부엌 선반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냉장고에 필요한 재료는 계란 밖에 없는데요…."

"다 찾으면 돌아갈 수 있다는 건가. 그럼 일단."

원래 모인 인원을 고려하여 넉넉하게 네 개. 깨지지 않게 상판에 올려놓은 뒤 다시 두 개를 꺼냈다.

"부재료는 이미 갖춰져서 다행이네. 전자레인지에 넣어서 찔게."

"드시려고요……?"

"배고프잖아."

"아직 찾을 것도 많으니까요!? 저, 저는 신경 안 써도 돼요."

"뭐 어때. 제한 시간도 따로 없는데."

계란물을 풀고 소금과 맛간장을 적정량 섞어 전자레인지에 4분. 자취용 레시피는 검색할 필요도 없이 간단했다. 기다리면서 다른 일을 해도 될 텐데 투명한 문 너머로 용기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습은 한참을 지켜보게 된다. 신지가 나란히 선 상대를 슬그머니 올려다 보았다.

"나기는 의외로… 여유롭네요."

"아… 그런가. 당시엔 한창 신경을 곤두세웠으니까. 미안."

"사과는 됐어요! 어… 어머니가 조금 더 이해해 주셨다면."

"정말 그렇게 생각해?"

"……."

"미안.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것도 괜찮아요. 나기, 사과가 빈번하지 않아요?"

"너한텐 미안한 일 투성이였으니까."

애 앞에서 싸워서, 그러느라 소홀하게 굴어서, 대뜸 나가서 살겠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는 막내의 아무것도 몰랐다. 때를 놓친 부채감이 간만의 재회마다 발목을 붙들었다. 정작 당사자는 성공적으로 거리를 두고 안심했겠지만. 그래서 자신이 다정하게 대할 때마다 분에 안 맞는 행운을 손에 쥔 것처럼 어쩔 줄 몰라했지만.

"난 그냥 완벽한 첫째가 되고 싶었거든. 엄마가 동생들에게 소홀하다면 그 부분까지 깔끔하게 해내서."

"그… 그런가요. 지금도 잘 하고 계신데."

"모르겠어. 네가 보기엔 괜찮나."

"음… 나기는… 눈치가 빨라서 언젠가 들킬지 모른다고 생각했죠……."

"아주 편한 상대는 아니었겠군."

"아… 아버지가 그런 부분에선 상냥하셔서."

'그 사람이 몇 년 후 널 찌른다고 말할 순 없지…….'

띵. 어느새 4분이 흘렀다. 전자레인지 안쪽이 컴컴해졌다. 달궈진 용기를 감쌀 천이나 식기를 찾다 보면 감각이 현실로 돌아왔다. 시간에 관해선 이해를 포기했지만 추억을 꺼내든 이유는 뭘까.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끄집어내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를 나눈들 무슨 의미가 있다고.

"돌아가면 전부 잊어 버릴지도 몰라."

"앗……."

"싫구나."

"모처럼 나기의 속내를 들었으니까……."

"짐작했을 텐데."

"직접 듣는 것관 다르잖아요."

"그것도 그래. 그러면 나도 한 가지만."

"뭔데요?"

입과 전자레인지 문은 동시에 열렸다. 그러나 더 큰 소리가 두 사람을 덮쳤다.

부엌 대들보가 나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이 이상은 안 된다는 것처럼.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나기가 태평하게 고민하며 아이를 내려다 보았을 즈음. 공교롭게도 신지 또한 같은 의문을 품에 안고 있었다. 만취한 사람이 눈앞에 널브러졌으니 상황은 이쪽이 더 심각했다. 취객을 달래는 게 긴급한 사건이냐면 또 아니지만. 붉은기 도는 눈가는 아이라인이 약간 번졌을 뿐 깔끔했다.

"나기, 혹시 지금 몇 살이에요?"

영화의 시간여행자가 길 가던 사람을 붙잡고 연도와 날짜를 묻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만취한 나기는 순순히 웃으며 대답했다.

"언제 다 끓어~"

"…아직 더 익혀야 해요."

스끼야끼 재료로 가득 채웠어야 할 냄비는 채소만 한가득이었다. 갑자기 객실에 들어와 해장국 좀 끓여달라던 과거인은 쟁반의 곤약을 보고 자기는 우동이 더 좋다며 아쉬운 한숨을 흘렸다. 그 사이 신지가 손거울을 꺼내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붉은 안경과 색을 맞춘 듯한 베레모. 어깨를 덮는 기장의 머리카락. 가디건과 치마를 보고도 나기는 자신을 신지라고 불렀다.

"이상한 질문인데… 혹시 저 어떻게 보여요?"

"진짜 이상한 질문이네. 흠, 좀 달라졌나."

턱을 괴고 옆으로 엎드렸던 상반신이 절반 정도 일으켜졌다. 숯 가까이의 공기는 더웠고 취기로 평소보다 체온이 오른 손바닥이 신지의 뺨을 감쌌다 아프지 않게 당겼다.

"너 기숙사 들어가고선 통 얼굴을 못 봤잖아. 졸업하면 카가와까지 독립한다 그러고."

"카나가와지만요."

"어쨌든, 혼자 지내니까 살 만해?"

"음… 좋을 수만은 없죠. 하지만 나쁜 것도 아니에요."

"우리 집 별로잖아. 어디라고 안 그렇겠냐만, 징그러운 영감도 계시고."

"그분은 조금… 곤란한 부분이 계시죠. 레이야도 불편해 보여요."

"가여워. 토우세이 님이 사람 신세 여럿 망쳤지."

"신경 쓰여요?"

"…물 끓는다~"

토우세이의 첫째 손자는 시야가 넓어 가끔은 과하리만치 동생들을 배려했다. 어릴 적엔 그 눈썰미에 정체를 들킬까 두려웠고 사춘기를 넘기자 죄책감이 눈에 들어왔다. 막내에게만큼은 한없이 관대했다지만 한 지붕 아래 저절로 민낯이 드러났다. 모친과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우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소우와 날카로운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관조적인 위치에서는 안쪽의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사실이 내려다 보인다. 하루나는 나기를 이해하려 들지 않았고 나기는 소우의 곤란함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가장 닮기 싫었던 사람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같은 연쇄를 반복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신지만은 굴레에서 멀거니 벗어나 있었다. 숨기려 해도 떠오르는 것들 사이에서.

"생각해 봤는데."

"네."

"역시 고기를 넣어야겠어."

"…괜찮겠어요? 속 안 좋으면서."

"멀쩡해. 소스도 더 부탁하자."

나기가 문을 반쯤 열고 종업원을 불렀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호출이라면 무언가 다를까 기대했지만 메아리만 멤돌았다. 어깨를 돌려 복도를 내다보니 방에 들어올 때와 똑같은 각도에서 햇살이 쏟아졌다. 나기가 먼저 복도로 나가면 신지도 뒤따라 걸었다. 갑자기 나타난 그는 탈출의 실마리다. 단순히 취해서 무방비해진 모습이 신경쓰이기도 했다. 복도를 따라 걷는 어깨가 흥에 겨워 좌우로 흔들거렸다.

"그러다 넘어져요…!"

"그럼 잡아줘."

스스럼 없이 팔을 내미는 행동을 근래 들어서는 거의 하지 않았다. 팔생의 집에 갇히기 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 명절에 얼굴 보는 게 고작이라 데면데면한 사이.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는 관계가 최고라 계산했다. 그래서 그때는 궁금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돌아오지 않겠다고 말했을 때 울타리 안에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지나가 버린 그 순간의 감상만은 바깥에서 불명이다.

"어쩌다 이렇게 마신 거예요. 설마 차였어요?"

"어, 빙고."

"진짜였다고…!" '이맘때 나기의 애인들을 생각하면 헤어지는 게 낫지만.'

"우리 사이 더 좋은 방법들이 많았겠지.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어."

"왜요?"

"나를 보여주기 망설여져서."

"그건… 그럴 수 있지 않아요? 애인이라서 못 보여주는 부분도 생기는 거겠죠."

"누구한테든 날 깊이 알려주고 싶지 않아."

저한테도 있어요? 그런 질문은 무의미했다. 서로가 조금씩 자신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 네가 독립한다고 했을 땐 안심했어. 앞으로도 너랑은 소우처럼 싸우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좌우로 창문이 난 길목을 벗어나 부엌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 벽 사이의 길은 어두웠지만 다른 방에서 스며드는 빛으로 서로의 표정이나 주변 사물은 분간할 수 있었다. 나기의 뒤로 두 사람이 찾던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천장에서 내려온 팔뚝만한 갈고리에 여러 부위의 고기가 걸려 있었다. 입맛에 맞는 부위를 취하라는 듯 원형에 가까운 모양새. 걸을수록 주변 공기가 가라앉는 건 생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함일까.

"가끔 집안 모두가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로 보여. 해결은 익숙해. 그러니까 애인도 내가 필요한 사람을 골랐어. 누군가를 돕고 다스리는 게 가장 익숙하니까."

"그래도 한 명 줄어든다고 하니 몸이 가벼운걸."

"그건 연애 감정이라고 하기엔…"

"하하. 다시 정의하기엔 어차피 늦었어."

정체불명의 타인을 위해 숨이 끊기고 정형된 육류가 복도에 나란히 늘어섰다. 한가운데의 나기는 언제나처럼 평온한 얼굴로 신지를 바라보았다. 관성적으로 내어주며 문제를 해결하는 위치에서 효능감을 얻기도, 거기서 피로를 느껴 돌연 관두어 버리기도 그였다.

다만 새로운 질문은 눈앞의 사람에게서 답을 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몇 년 후 나기는 저울의 한쪽을 선택했는데 눈앞의 사람은 결정의 존재조차 아직 몰랐다. 어릴 때와 다르게 삼십 대의 몇 해는 무난하고 평온하게 흘러간다지만 더 먼 과거로부터 온 저주가 가면을 찢어발겼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것처럼. 그렇다면 이미 옛날과는 다르다. 외피를 탈바꿈한들 내면의 극적인 변화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나기가 가까운 갈고리에서 고기를 꺼내 내렸다. 한 뭉텅이를 냄비 요리에 어울리도록 얇게 잘라내려니 까마득했다. 요리가 익숙한 그에게 부탁하면 흔쾌히 도와 주겠지만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무거워…….'

몸을 돌려 가슴 위로 쓰러진 나무 기둥을 치우자 겨우 편하게 숨이 쉬어졌다. 자세를 고쳐앉자마자 천장에서 붉은 종이가 나풀거리며 떨어졌다. 얼굴에 붙은 것을 떼니 이번은 한 문장이다. '주어진 레시피 외의 요리는 엄금합니다.'

그런다고 냅다 머리를 내려쳐? 그는 여전히 부엌에 쓰러져 있었다. 어린아이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고 부엌 모서리의 뒷문에서 얇은 빛이 새어나왔다. 자신이 재료와 사람 중 무얼 찾고 있는지 문고리를 돌리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식당 뒷마당은 창고와 주차장이 붙어 있었다. 간단한 밑반찬에 필요한 야채를 직접 키우는 텃밭도 보였다. 초록 잎사귀가 고개 내민 밭 근처의 인영을 눈치챈 나기는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초등학생에 이어 고등학생이다. 아까처럼 농담하며 놀릴 상대는 아니었다. 기둥에 붙어 모퉁이를 넘으니 들어왔을 때와 비슷한 수의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타고 온 차에 시동을 걸어봤지만 잠잠했다.

검은 세단의 차주는 하루나였다. 나기의 차량은 뒤에 짐을 실을 공간이 넉넉한 오프로드용 박스카. 원래 타던 suv를 처분하고 새로 매입했다고 이야기했을 때 안경테 너머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날 신지가 차마 꺼내지 못했던 질문을 고등학생 소년을 앞에 두었던 나기도 품고 있었다.

"너 정말 떠나니."

텃밭 가까이의 신지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는 두부 물기를 빼던 누름돌을 치우던 중이었다. 사람과 재료가 함께 나기를 기다렸으니, 이 참에 물어보는 편이 나았다. 안쪽의 일이 바깥에선 무효가 되길 기대하면서.

사실 거짓말이다. 동생이 찔린 유리조각의 날카로움도 재와 먼지와 연기도 아직 기억에 생생했다.

"나기도 자취하면서."

"넌 나보다 어리잖아."

"…그, 나기가 신경쓸 부분은 없어요. 곤란한 일도. 저번에 말한대로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그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어."

'아쉬움인가.'

"미리 친해졌다면 네 속내를 더 들을 수 있었을 텐데."

"……."

눈앞의 소년은 인두겁을 뒤집어쓴 거짓말쟁이다. 머뭇대는 척 침묵으로 진실을 무마하고 있다. 지금은 굳이 들추기보단 상대가 섣불리 반응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용하기로 했다.

"너희가 뭘 생각했는지 전혀 몰랐구나 해서."

"너무 상냥하지 않아요? 요즘 회사 일로도 바빴잖아요."

"친절과는 조금 달라. 안일했어."

"그러니까… 그 정도는."

"가족이 한 명 줄어서 편하다고까지 생각했는걸."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내 뜻은 달라."

"…부채감?"

"비슷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딱 한 번 소우와 의견이 맞았던 적이 있다. 나기가 희생적이라기보단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것.

"아버지와 널 위해 탐정을 죽였던 것도, 그 전부터 집안의 모든 문제를 끌어안으려던 것도 내 욕심이야. 소모되는 것쯤은 감수해야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는 아니까."

"그게 뭔데요?"

자연스러운 질문은 적정한 거리감에서 비롯되었다. 가게에 함께 들어왔던 몇 년 후의 그보다 훨씬 침착했다.

"너한텐 편하게 말할 수 있겠지."

"그래서 안 돼. 돌아가게 해 줄래."

겨울치고 해가 좋아 땅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시야를 일그러트리는 지면에서 고개를 돌리자 아까의 붉은 종이처럼 허공에서 무언가 나풀대며 떨어졌다. 얇은 얼굴 가죽이 익숙한 골격을 흉내내도록 조형되었다. 발치에 남은 두부를 들고 나기는 가게 안으로 돌아갔다.

상충되는 욕망을 두고 오래 갈등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가도 누군가와 어울리고 싶었다. 어느 날엔 가족이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자고 일어나면 평생을 지켜보고 싶었다. 신지가 독립하면서 처음으로 그게 불가능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동시기에 저초자도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혈연의 영구성은 제도가 만들어낸 환상. 요즘 세상엔 연을 끊어내기를 넘어 신분조차 지워버릴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자신도 가능했다. 그렇지만 왜, 트럭에 부딪혔을 때는 천벌이라고 생각해 버렸을까.

'이런 고민이 필요없다는 점에서 가족보다 타인이 편한데. 사랑하게 되면 비슷해지지만.'

'정말 자유만을 원했다면 이름도 집도 가족도 전부…….'

그래도 여전히 토가이의 나기다. 피보다는 시간이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만들었다. 귀신의 집도 비슷한 기준으로 집안 사람을 구분했다. 맞은편 복도에서 나타난 상대가 강력한 증거다.

"이마 괜찮아요!?"

"아, 좀 부딪혔어. 레시피 외의 요리는 금기라니까 조심해."

"헉…."

"혹시 했어?"

"비슷한데 별일 없었어요. 아마… 저희는 일단 냄비 요리라서?"

"저희라. 혹시 옛날의 나인가."

"…이것도 비슷했나 보네요."

"막 우리 집에 왔던 너랑 고등학교 졸업하려던 너."

"같은 시기의 나기를 만났어요."

"우연인가."

"아닌 것 같죠?"

"일단 이것부터 해결할까."

마지막 재료는 표고버섯. 두 사람이 선 복도의 맞은편 끝이 원래 예약했던 방이다. 길을 안내하듯 벽에 버섯이 빼곡하게 자라났다. 형태가 자리잡혀 가는 포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천천히 마른 벽을 뻗어나가며 습기를 흡수했다.

"사람 얼굴 버섯 징그러워……."

"이런 걸 먹으라고. 독이 든 비주얼이야."

개중에는 평범한 표고나 송이버섯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의 포자는 사람 얼굴을 짓다가 무너트리길 반복했다.  얼굴 골격을 갖추면 아래로 목뼈와 쇄골이 자라나 서서히 인간의 전신을 갖춰 나갔다. 불쾌한 골짜기에 갇힌 가족들의 얼굴이 솔직히 비위가 상했다.

재료를 전부 모았으니 방에 돌아가 끓이기만 하면 끝. 그 통로를 인간 버섯이 가로막았다. 재료를 모아달라는 음식점이 마지막에 손님을 잡아먹는 전개는 미야자와 겐지부터 내려온 전통이다. 팔이 완성된 개체가 두 사람을 향해 손을 뻗으며 허우적거렸다.

"곰팡이는 햇볕에 말리면 되는데 버섯은 어쩐다."

"태울까요? 부엌에서 토치 봤는데."

"음."

앞으로 방까지는 벽과 문으로 가로막힌 좁은 길. 양옆이 트인 복도는 부엌과 가까워 출구와는 멀어졌다. 다른 방문을 열어두자니 이미 예상했는지 버섯 팔은 문 손잡이 근처에 특히 득실거렸다.

"성냥은 나도 있어. 부탁 하나만 하자."

"다행이다. 뭔데요?"

"불 속에서 제대로 걸을 자신 없어. 방에 들어가면 우선 창문부터 열어줘."

"…그냥 숨 쉬기 힘들어서는 아니죠?"

"아마… 너는 잊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일부러 화제 삼지 않고 아닌 척 지내왔지만.

"네가 죽은 날 내가 갇힌 방은 불을 났잖아."

"……그럼 그냥 다른 방법을 찾으면요?"

"짧은 길이니까 괜찮아. 방금 부탁대로만 맡길게."

뒷주머니에서 성냥 한 갑이 만져졌다. 병원의 크리스마스 자선 행사에서 팔았던 품목이다. 버섯으로 그늘진 공간에 성냥갑의 트리 일러스트만 알록달록했다. 신지는 성냥을 받아드는 대신 나기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얼굴로 볼까봐 말하기 싫었는데."

"끝까지 숨기려 했어…!?"

"가급적이면. 시간이 해결할 문제잖아."

"시간만이 답은 아니죠. 돌아가면 다시 병원 가요."

"…그래."

과거에 따라잡히기 전에 두 사람은 달렸다. 순식간에 불이 번졌다. 목조 가옥이 불쏘시개로 변모해 벽에서 시작된 화마가 천장과 바닥까지 집어삼켰다. 불길을 건너뛰고 잔해를 피하다 보면 금방 목에 땀이 맺혔다. 타오르는 연기 속으로 모방된 기억이 환상처럼 피어났다. 누군가는 웃고 반대편의 누군가는 울었다. 사람의 뇌는 행복을 취사선택한다던데 가족과의 기억이 무엇이든 오래 남는 건 불행과 행복이 엉켜 있어서다. 만약 한 쪽만 골라서 편해질 수 있다고 해도.

"고를 수 없었어."

"네?"

"돌아갈지 말지."

"...돌아가야죠!?"

"에이, 지금 말고. 나중에."

"...전화하면 받는 거 맞죠?"

"받기만 하겠어. 부모님하고도 계속 얼굴 보게 될 거야."

끝없이 이어지던 복도가 끝에 다다르자 올해 크리스마스의 풍경이 보였다. 병동도 바깥 거리와 다름없이 가족 모임으로 분주했다. 기억에 남지는 않았어도 비슷한 추억이 자신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감각이 예감을 남겼다. 혈연 단위의 행복은 존재하다가도 깨졌고, 상처를 봉해도 자국이 남았지만, 흉터가 희미해지면 그럭저럭 미온적인 기쁨과 슬픔이 뒤섞인 채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가족과는 분리된 개인의 인생을 서류 몇 장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위조와 편입 또한 쉽다.

어려운 것은 언제나 증명이다. 당연히 공유해 온 가족 사이 감정을 모르는 타인 또한 가족이라 일컬을 수 있는지. 타인됨과 가족됨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지. 닮지 않았기에 안심했으나 다르기 때문에 불안했다. 서로 아끼고 배려한들 결과적으로 손패와 표정을 숨긴다면 부딪혀서 깨져온 사이만큼 친밀해 수는 없다. 그런 관계를 바란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밀면 밀려나는 만큼 편의를 봐 준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서 지금도 친절을 이용할 요량이었지만.

"그러니까 신지, 가지 말라는 말은 절대 하지 마렴."

"난 정말이지 모두와 꿈처럼 살고 싶었거든."

그러니 제대로된 가족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 보고 느끼는 간극을 좁히는 방법도. 모르는 채 미미한 불안을 흘려보낼 것이다.

검게 타오르는 벽면 사이로 틈새가 열렸다. 안에 뛰어들기 전 나기는 신지를 붙잡고 남는 손으로 버섯을 있는 힘껏 쥐어뜯었다. 매캐한 매연에 눈이 따갑고 목이 간지러워도 의외로 무사히 걸을 수 있었다. 십몇 년을 감췄던 맨얼굴을 드러내거나 사람을 죽인 체험을 했으니 옛 잔재의 간섭은 한계가 컸다. 문제는 언제나 예기치 못하게 찾아왔다. 올해, 내년, 혹은 더 먼 미래에. 그런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는 위안이 되었다.

가장 먼저 소리로 변화를 깨달았다. 벽 너머 다른 방과 복도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웃음 소리, 부딪히는 사케 잔. 마주보고 앉은 두 사람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상황 정보를 받아들였다. 가쓰오부시가 우러난 국물에 고기와 야채, 곤약이 보글보글 끓고 있다. 날달걀 옆으로 서비스로 나온 우동 면발에서 윤기가 흘렀다.

"소우, 어머니 아버지는?"

"아까 옆 방에 아는 사람 있다고 나갔잖아."

소우는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는 채 대답했다. 따라나갈까 하다가 그냥 자리에 머물렀다. 바로 눈앞에 국자가 보였다. 건네려던 차에 신지가 창가로 손을 뻗었다.

"이제 창문 안 열어도 돼.”

"...진짜죠?"

"나왔잖아. 바깥 공기 춥고."

잘 익어 붉은기가 사라진 고기와 숨 죽은 야채를 고루 골라 앞접시에 담고 그 위로 국물을 두 어 번 부었다. 나기가 같은 방식으로 두 그릇을 채우는 동안 신지는 아직 냄비에 들어가지 않은 싱싱한 재료를 모두 쏟아넣었다.

잘 먹겠습니다. 동시에 울린 목소리.

일인분에 만 엔을 호가하는 고급 식당이라지만 스끼야끼 맛은 사실 거기서 거기다. 재료의 질적 차이도 소스가 희석한다.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성냥불에 피어오른 환상 속 진수성찬, 까치발을 들고 내다봤던 어느 일가의 화목한 풍경 속에서 상상했던 맛이다. 나기는 비교적 익숙하게 젓가락을 움직였다.

"원래 스끼야끼가 그렇지만… 먹다 보니 잠이 오는걸. 따뜻해져서."

"맛 자체는 펑범한데, 오랜만에 먹는 기분이야."

"먹다가 잠들면 제가 옮길게요. ……노, 농담. 저는 처음처럼 느껴져요…."

"아하하."

현실로 돌아와 몸에 훈기가 돌자 지난 행동을 돌아보게 된다. 불편함과 익숙함은 여전히 뒤섞인 채다. 그래도 포만감에 부끄러움과 슬픔만은 조금 잊혔다.

"신지."

"네?"

"아냐. 아무것도."

어깨에 기대 잠들었다가도 일어나도 현실은 그대로. 공유했던 체온만은 혈관을 타고 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사람이지만 그저 네 생각을 하고 있단 것만은 믿어주렴.

다섯 가족이 식당을 나설 때는 하늘에서 함박눈이 쏟아져 땅 위의 모든 흔적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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