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합작은 시나리오 〈Cryptbound〉 엔딩까지의 치명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차량이 견인되었다고요.”
“거의 부서진 걸 가져가던데.”
“그럼…… 회수해올 게 아니라 폐차시켜야겠네요.”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야. 누가 봐도 폐차 감이니까.”
“…….”
나다니엘은 한쪽만 남은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책상 맞은편에는 요한이 서 있었다. 의무에서 자유로워졌으니 느슨해질 법 한데도 그는 여전히 넥타이까지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짐승이 한 번 가지고 태어난 가죽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요한도 굳이 복장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아무리 단정하게 차려입고 있어도 요한은 요한이다. 그는 방만하게 말했다.
“폐차하라고 해. 새로 뽑으면 그만이지.”
“누구 돈으로요.”
“내 돈으로.”
“당신 돈은… 엄밀히 말하자면 노아 재단의 재산이에요.”
요한은 ‘그게 뭐 어쨌다고?’ 라고 말하는 듯한 얼굴로 나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는데, 나다니엘 때문이라기보다는 차 때문 같았다. 뽑은 지 2주 된 스포츠카를 몇 번 타보지도 못하고 폐차시켜야 한다면 누구라도 상심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요한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쪽 눈썹을 구긴 요한이 곧 묘안이라도 생겼다는 듯 얼굴을 펴며 말했다.
“아니면 물어내라고 하든가.”
“물어내요? 누구에게요. 그러고 보니 아직 정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어쩌다가 차가 수습도 못 할 정도로 망가진 거죠.”
요한은 명쾌하게 답했다.
“형사님이지.”
“…….”
“괴물한테 물어내라고 할 순 없잖아.”
“그 얘기…… 조금 더 자세히 해주실래요?”
그리고 이어지는 요한의 설명은 이랬다: 필립의 비번일. 두 사람은 도시 외곽으로 드라이브를 떠났다. 생년월일부터 인적사항까지 거짓이 아닌 게 드문 요한은 당연히 면허도 없었지만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했다. 저택 거래가 정리되는 대로 구입한 차가 마침 그 날 준비되었고, 날씨도 좋았고, 햇빛 아래 새로운 애마는 끝내주게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아마 필립은 요한의 자격을 지적했던 것 같지만 (“넌 면허도 없잖아!”) 아무래도 욕망과 양심 중에 전자를 택하고 말았다. (“그래서 안 탈 거예요? 오늘이 첫 시승일인데요.” “그건… 그럴 수 없지.”) 요한이 혼자 차를 모는 것보다야 동승인이 있는 게 안전할 것이다. 그런 구색 좋은 핑계를 갖추고 두 사람은 호기롭게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실제로 요하네스의 교육 과정 속에는 운전을 포함한 생활 기술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별 문제가 없었겠지만…
“길 중간에서 괴물이 나타나서… 마침 형사님이 악켈테를 가지고 있었거든.”
“…필이 차 안에서 총을 쐈나요?”
“덕분에 차가 뒤집어지는 일은 면했어.”
박살은 났지만 말이다.
“…….”
다시 한 번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깨고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말해두겠는데, 연락하지 말자고 한 건 형사님이야. 난 너한테 전화하자고 했어. 뒤처리하기 귀찮으니까.”
“필이… 그랬군요…….”
“그래. 고집을 부려서는 길에서 얻어 탈 차를 찾느라 고생했다고.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 줄 알아?”
이쯤 되면 요한을 추궁해봤자 더 나오는 건 없다. 나다니엘은 짧게 한숨을 쉰 다음 검토하던 서류를 옆으로 밀어두고 노트북을 끌어왔다. 요하네스의 명의로 된 차를 폐차하려면 몇 가지 조작 서류가 더 필요했다. 나다니엘은 바쁘게 타자기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새로운 차량은 재단 경비를 통해 마련해 드릴게요.”
“이전이랑 똑같은 걸로.”
“그건 어려울 거예요. 그만한 고액은 승인 절차를 받는 데도 꽤 오래 걸리고요.”
“그럼 둬. 내가 살 테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당신의 돈은 엄밀히 말하면…….”
나다니엘은 이대로 가면 언쟁이 끝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직감했다. 그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 비겁하지만 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
“운용 가능한 자산과 정확한 차량명, 구매 금액을 서류로 작성해 오시면 검토해 볼게요.”
“귀찮게 굴긴… 그렇게 해.”
뒷일로 미룬 것이다. 제멋대로지만 규칙과 계산에 밝은 요한은 어렵지 않게 승낙했다. 태어나자마자 수명결 테이블에 앉는 방법부터 배웠으니. 판을 휘두르고 패를 엿보는 건 요한에게 손가락 움직이는 일만큼 쉬울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세상 일이 언제나 도박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뿐이겠지. 아직 요한이 거기까지 알 필요는 없다고 나다니엘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굳이 재단의 관리인 자격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요한은 신경써야 할 존재다. 그가 세상 문물에 밝고 수완이 좋다 해도 나다니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요한.”
이야기가 적당히 마무리되고 돌아서는 요한을 나다니엘이 불러세웠다. 요한은 장갑을 낀 손으로 문고리를 잡으려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성탄절이 곧이니까, 다음 주 쯤에 다시 집에 들러 주세요.”
“오늘 왔는데 또 와야 하나.”
심드렁한 대답이었다. ‘꼭 본가에 오기 싫어하는 막내 동생 같아.’ 어쩔 수 없는 감상이 들었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재생성된지 얼마 되지 않아 요한은 집을 하나 매입해서 독립했는데, 혼자 살 용도라기엔 지나치게 크고 으리으리한 저택이었다. 그의 매매 희망서를 보고 나다니엘이 진지하게 두 번 정도 말렸지만 요한의 태도는 강경했다. 그때쯤 나다니엘의 마음도 느슨해져 있어서 결국 요한은 방 여섯 개짜리 저택을 손에 넣었다. 어떻게 사는지까지 캐묻지는 않지만, 이따금씩 관리인을 보내 집 정리를 도우면서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나다니엘의 일이었다. 모두가 이어지고 싶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끊을 수도 없다면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때도 중요한 법이니까요. 기다리고 있기도 하고요.”
나다니엘이 조금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는 분명했다. 요한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눈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어 말했다.
“직접 말하라고 해.”
“음, 네. 아마 그렇게 할 거예요.”
나다니엘은 그제서야 조금 미소지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해의 마지막 날까지.
확실히 연말은 그들에겐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적어도 의미를 만들어가려고 노력했다.
“미아.”
고풍스러운 드레스와 장갑, 퍼로 온몸을 감싼 미아는 못박힌 것처럼 쇼윈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상태의 미아는 아무리 불러도 소용없다. 나다니엘은 미아를 붙드는 대신 옆으로 다가가 시선의 끝을 쫓았다. 유리창 너머에는 조명을 반사하는 반지며 목걸이, 시계 따위가 보기 좋게 늘어서 있었다.
“주얼리 가게네요.”
“응.”
“들어가 볼까요?”
“응.”
미아는 곧바로 발을 옮겼다. 높은 구두와 거추장스러운 레이스를 두르고도 미아의 발걸음은 거침없고 우아했다. 오히려 불편한 옷이 미아를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제어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친절한 얼굴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찾으시는 물건 있으세요?”
나다니엘은 여전히 미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가 그가 한쪽 가판대 앞에 멈춰 선 걸 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웃었다.
“천천히 둘러보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드릴게요.”
주얼리 가게 직원은 나다니엘 일행이 ‘조용히 쇼핑하고 싶어하는 타입’이라는 걸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손님.” 하는 인사를 남기고 서둘러 다른 구역으로 사라졌다. 어쩌면 한 사람 한 사람을 전부 살피기엔 너무 바쁜 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를 목전에 둔 주말. 소중한 사람을 위한 선물로든 자기 자신을 위한 위안으로든 보석은 언제나 인기가 있었다. 제법 큰 주얼리 가게는 섹션마다 인산인해였고, 나다니엘과 미아도 그 사이에 제법 평범한 손님처럼 섞여들었다.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던 중에 구경하러 가게로 들어왔으니 평범하지 않다고 할 이유도 없었지만. 나다니엘은 종종 스스로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일상적인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듯이 세상에 끼어들어 웃고 이야기하는 자기 자신이. 꼭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채로 무대에 올라 필사적으로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 같았다.
“나다니엘.”
“네? 아. 마음에 드는 물건이라도.”
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엔 없어.” 그리고 다시 앞서 걸어나갔다. 걸음이 빠른 미아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면 나다니엘이 뒤를 따랐다. 미아의 제멋대로인 태도와 독특한 기운은 그를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게 했다. 덕분에 나다니엘은 자유분방한 여동생을 쫓아다니는 오빠처럼 보였다.
“아, 죄송합니다. 앞에 일행이 있어서요.”
나다니엘이 고개를 숙일 때마다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점가를 채운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가족으로 묶였다. 그건 아주 당연한 일이면서도 좀 이상한 기분을 들게 했다.
“여기에도 마음에 드는 게 없나요.”
“전부 안 어울려. 나다니엘도 찾아.”
“으음, 미아가 뭘 찾고 있는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나다니엘은 캐묻는 대신 미아와 상점가를 몇 바퀴 더 돌기를 택했다. 애초에 크리스마스 쇼핑이란 이런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거리를 돌아다니며 화려한 조명과 일루미네이션에 홀리고, 막상 들어간 가게에는 내가 찾던 게 없다는 사실만 계속해서 깨닫는 행위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미아는 정석적인 쇼핑을 하고 있었다. 간판이며 불빛에 유인당해 고개를 디밀었다가 실망스러운 기색으로 돌아서는 일이 이어졌다. 미아의 얼굴은 언제나 인형처럼 그대로였지만, 몇 개의 상점에서 허탕을 치고 나자 슬슬 따분한 표정이 되어갔다. 나다니엘은 넌지시 물었다.
“힘들지는 않아요? 조금 쉬어가도 괜찮은데.”
“어차피 밖에서는 못 쉬는걸.”
“음, 미아의 공간만큼 편안하진 않겠지만 앉아있을 만한 곳 정도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나다니엘이 먼저 발걸음을 옮기자 미아도 따라는 왔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신라를 통해 물건을 구입했다고 했던가. 나다니엘은 미아의 곱슬거리는 금빛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미아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붉은 보석 목걸이는 그날 깨져버렸다. 지하실에 틀어박힌 미아는 요한이 재생성되기 전까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미아의 사고는 지나칠 정도로 단순해서 손에 잡고 있던 게 사라져 버리면 다른 것으로 채우는 방법을 모른다. 텅 빈 지하실이 그랬던 것처럼. 요한의 어딘가에 여전히 마리안이 있다고 믿지 않으면 다른 무엇과도 연결될 수 없다. 그러니 거짓이라도 붙잡아 투명한 끈을 만들어야 한다. 맞는 일이니 틀린 일이니 따져기엔 이미 삶이 너무 모자라다.
“여기서 잠깐 쉬어갈까요.”
그건 나다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미아를 살짝 끌어 카페 소파에 앉혔다. 다행히 푹신한 2인석 한 자리가 남아있었다. 잠시 숨을 돌릴 무렵, 나다니엘은 미아의 시선이 한 구석에 머문 것을 눈치챘다.
“아… 크리스마스니까, 케이크가 나와 있네요.”
딸기 생크림 케이크였다. 흰 생크림 아이싱에 붉은 딸기가 보석처럼 올라가 있었다. 마리안의 물기 많은 눈이 떠날 줄을 모르자 나다니엘은 가만히 물었다.
“케이크 좋아해요? 미아는 과자를 대부분 좋아했던 것 같지만.”
“마리안의 생일 케이크야.”
“아, 생일이 겨울이니까.”
“한 조각씩 가져다 줬어.”
“좋았겠네요.”
마리안의 생일은 곧 미아의 생일이기도 하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나다니엘은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가볍게 쳤다. 미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나다니엘에게로 향했다.
“좋은 생각이 있는데.”
“무슨 생각?”
“음, 미아가 지금까지 해보지 못한 일을 하나 같이 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나하고 나다니엘이?”
“이왕이면 다같이 있을 때가 좋을 것 같은데요. 곧 크리스마스니까요. 요한도 올 거예요.”
“필립도 오겠네.”
일부러 빼놓은 이름을 미아가 콕 집어 언급했다. 나다니엘은 잠시 움찔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필립도.” 그에게 해 줄 잔소리가 산더미같았지만 우선은 미뤄두기로 했다. 쇼케이스 안의 생크림 케이크가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으므로.
“그래서 늦으신다고요.”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바깥 봤어?”
“봤죠. 폭설이 내릴 것 같으니까 어제 출발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도 제가 말했죠.”
“……오늘까지 근무였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사정을 이야기하면 안 될 것도 없었을 텐데요.”
“…… 일이 그렇게 쉽게 뺄 수 있는 게 아니야! 겨울엔 돌발상황도 자주 발생해서.”
“저는 안 해본 일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
수화기 너머의 필립이 잠깐 할 말을 잃었다. 나다니엘은 상대방에게 들리지 않도록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추궁하려는 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것도 알고 있다. 나다니엘은 필립에게 기대하는 게 거의 없었다. 자신도 좀 신경써 달라고 항의하던 필의 파트너 네이트는 이미 3년 전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이 자리에 있는 건 새로운 이름을 받은 노아 가문의 관리인이다. 돌이킬 수는 없다. 굳이 시간의 불가역성을 들어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너무 멀리 가버렸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알아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거죠. 변명을 들으려는 게 아니었어요.”
“네가 먼저 ‘그러니까 제가 말했잖아요’ 라는 식으로 나왔잖아?!”
“그건 사실이니까요… 필. 지금 운전 중이죠?”
“어어.”
필은 긍정했다. 아마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은 채 눈길을 대충 거슬러 오고 있겠지… 그 장면을 상상하면 또 뒤편으로 미뤄뒀던 화가 치솟을 것 같았다. 정말, 정말 바라는 게 없는데 왜 항상 무언가를 요구하는 입장이 되는 걸까? 기껏해야 조금 더 침착하게 굴고, 자신의 안전을 신경써줬으면 하는 것 정도다. 이건 스스로를 위해서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조건이 아닌가?
“……알겠어요. 언제 도착할 것 같아요?”
“음, 아마 1시간… 1시간 반 정도. 밟으면 좀 더 줄일 수도 있어.”
“됐어요. 좀 더 늦어도 되니까 안전하게 와요.”
“엉, 알았다… 이제 괜찮은 거지?”
필립은 꼭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싶어했다. 나다니엘은 반론하는 대신 그가 원하는 답을 해주었다.
“문제 될 것도 없었어요.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사고만 내지 말아요.”
필립은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제서야 나다니엘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필립과의 대화 대신 밀가루와 설탕, 버터와 우유, 크리스마스와 선물 상자에 대해 떠올리려고 애썼다. 이런 언쟁에 대해 오래 생각하면 스스로 주제넘게 굴었다고 판단하게 되어서 싫다. 그러면 곁에 있을 이유도 이렇게 모일 이유도 사라지고 만다. 적어도 함께 있는 것만큼은 내 의지라고 말하고 싶다. 이미 너무 많은 운명이 우리 사이에 얽혀 있으니까.
“필립은 늦어?”
“아, 네. 좀 늦으신다고 하네요. 아무래도 눈이 많이 와서.”
“형사님한테 제일 어려운 거 시키지.”
“그랬다가 케이크를 망칠지도 모르는데도요.”
“이대로 해야 돼.”
미아가 지하실에서 가져온 그림책을 펼쳤다. 따스한 촛대가 켜진 테이블을 두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고, 중앙에는 생크림 케이크가 놓인 페이지였다. 나다니엘은 삽화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미아에게 이 행위는 아마 재현 이상의 의미를 갖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뭐든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지하실에서 죽은 듯이 잠만 자던 미아가 다시 저택 안을 돌아다니게 된 것처럼. 완전히 소멸했던 요한이 팔 한 짝으로부터 재생성되었던 것처럼. 행동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법이니 가능한 많은 씨앗을 뿌려두고 싶었다. 미아에게든, 요한에게든, …필립에게든 말이다.
“네. 그대로 할게요.”
“망가뜨리지 마.”
이어진 말은 요한을 향했다. 정작 들은 요한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나. 망가뜨리는 건 너겠지.”
“하하… 아, 필립이 늦을 것 같으니까 슬슬 시작할까요.”
웃음으로 적당히 분위기를 무마한 나다니엘이 재료를 꺼내두었다. 난데없이 베이킹을 시작하게 된 미아는 그다지 흥미 없는 얼굴이었지만, 마리안의 생일 케이크를 만든다는 명분에 그럭저럭 붙들린 것 같았다. 요한은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할 생각 없단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어서 대부분의 일은 나다니엘이 도맡았다. 원래는 필립도 도와주기로 되어있었지만… 그의 손재주를 생각하면 차라리 없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제누아즈가 다 구워졌을 때쯤, 1층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발을 터는 둔탁한 소음 이후 익숙한 목소리가 가까워지며 필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이트? 미아? 요한도 벌써 왔어?”
요한이 고개를 까딱하며 인사했다.
“형사님 오셨네요. 주인공이라서 제일 늦으신 건가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눈길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알아? 중간에 조난당하는 줄 알았어. 확 차를 버리고 올까 하다가…”
너스레를 떨던 필립은 날카로운 눈초리를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어쨌든 크리스마스 이브잖아! 이정도 교통체증은 이해해 줘야 돼.”
침묵이 오래 가진 않았다. 나다니엘은 성부 성자 성령의 힘을 빌어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 얼굴을 본 미아가 툭 내뱉었다.
“필립이 늦었으니까 또 싸우겠네.”
“……안 싸워!”
“안 싸울 거예요. 전 화 안 났어요, 미아.”
제법 평온한 목소리가 나왔지만 어조는 다소 차가웠다. 그의 말대로 화가 났다기보다는 우선순위를 바꾼 듯한 투였다. 지금 중요한 건 케이크를 제대로 만들고, 크리스마스 이브 밤을 근사하게 보내는 거다. 나다니엘은 한 번에 하나를 생각하기도 버거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필립과의 언쟁은 완전히 뒤로 치워버렸다.
“오늘은 형사님의 날이니까 봐 드리죠.”
“잘됐다. 뭐, 내 생일이라고 모인 것만도 아니니까…….”
요한과 농담을 주고받던 필립은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나다니엘이 어제 출발하라고 했었지. 어제? 문득 아주 중요한 걸 잊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출근 시간을 한참 지났을 때랑 비슷한 감각이었다.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 듯한 감각… 필립이 다소 굳은 시선으로 나다니엘을 힐끔 바라보았다. 나다니엘은 필립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아이싱을 준비하고 있었다.
“…….”
돌이킬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가.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필립의 인생에 재앙이 벌어지든 말든 케이크 작업은 막바지를 향해 갔다. 영 흥미가 없어 보이던 요한은 데코레이션할 딸기나 몇 개 집어서 입에 넣고, 생크림 모양에 훈수를 두었다. 조언자의 감각은 나쁘지 않았지만 막상 실천하는 필립의 실력이 꽝이라 크게 도움이 되진 않았다. 미아와 나다니엘이 맡은 부분은 상대적으로 그럴듯하게 완성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나다니엘의 공로가 컸다. 장식이 끝나면 케이크를 긴 테이블 위에 올리고 초를 켤 거다.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는 자정. 필립으로부터 미아에게로 축하가 넘어가는 그 때.
“곧 생일 축하해 미아.”
“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
“생일 축하했어 필립.”
“성탄절마다 이렇게 할 건가.”
필립이 말하고, 나다니엘이 받고, 미아가 대답하고, 요한이 딴죽을 건다. 일련의 대화가 어색하지 않다고 느낄 무렵 비로소 어설프게 가족 같은 형태가 완성된다. 미아가 펼친 그림책의 한 페이지처럼. 마리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던 수많은 가족들 대신, 이제는 네 사람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고 이 자리에 왔다.
이곳에 네 명의 계승자가 있다.*
죽음을 초월한 자.
살아있고자 애쓰는 자.
무덤에서 일어난 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생을 아낌없이 쓸 자가.
*시나리오 〈Cryptbound〉 캐치프레이즈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