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국의 상공을 나는 새들은 척박한 대지에서 창백한 얼굴을 본다. 창백한 회색의 뺨은 돌아누워서 눈송이를 맞으며, 머리칼을 베개 삼아 베고 북쪽에서 밀려오는 추위를 견딘다. 뺨과 턱 밑으로 타고 흐른 금발의 비유를 가져다가 퍼거스의 남부를 부른 시인은 많기도 많았다. 그러나 매년 겨울이 오면 그 머리칼도 백발로 새어 운율을 맞출 시구를 고민하게 했으니. 이슈트반에서 시인의 노래보다도 사냥을 알리는 뿔나팔 소리가 더 많이 들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궁수를 뒤에 거느리고 기사가 말을 달렸다. 기수를 내세웠다간 여우가 도망갈 우려가 있으니 대개 완장을 차거나 자수 허리띠로 소속을 구분했다. 여우 사냥 행렬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 전별했다. 참지 못하고 자신을 배웅하는 이가 몇인지 돌아보는 젊은 기사의 눈이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검을 찬 마을의 소년들도 함께 뛰었다. 이 틈을 타 새알을 줍고 기사들이 심심풀이로 사냥한 자고새나 토끼를 주워 오려는 것이었다.
“너무 어린데.”
“여우 사냥은 위험하지 않은 편이니까.”
가볍게 대답한 파스칼이 앞으로 끼어드는 군중에게 자리를 내주며 뒤로 물러섰다. 그걸 신호로 테리오스도 돌아서 무리를 빠져나왔다. 매년 이슈트반의 사냥제에 참석한 지도 오래되었다. 그리고 사냥제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지 안 후부터는, 이슈트반의 산골 끝자락으로 향하게 된 두 사람이었다. 그곳에는 밥맛 떨어지는 정찬이나 눈치를 보며 사냥감을 양보해야 하는 ‘접대 사냥’도 없었으니까. 올해 들린 릴캐스터에선 여우 사냥이 한창이었다. 작년 이 지역 늑대를 잡다 못해 전부 쫓아내 버린 유능한 사냥꾼들 덕에 상위 포식자가 사라져 여우 개체 수가 늘어난 게 원인이었다.
여우는 좋다. 퍼거스의 겨울 앞에 모피의 중요성은 당연하고, 무리 짓지 않아 역공을 당할 위협도 드물었다. 민첩하긴 해도 좋은 궁수와 사냥개만 거느리면 은여우 한두 마리는 잡아가 생색내기도 좋았으니 젊은 기사들이 몰리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그 탓에 북적거리는 사냥터에 흥미를 잃은 사냥꾼들은 화살집을 내려두고 이른 시간부터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날은 또 겨울답지 않게 더웠다. 차라리 혹한이 익숙한 퍼거스의 사람들은 느슨한 눈꺼풀과 싸우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작년에 너무 즐거웠다며 릴캐스터를 추천한 게 페이였지.”
“그렇지. 어디서 늑대 모피를 그리 구해왔나 했더니.”
“늑대 떼는 더 북쪽으로 이동했다던데. 갈래?”
“아니. 기다렸다가 흑여우가 있는지 보고 모피만 사 가자.”
테리오스는 어린 사냥꾼들의 솜씨를 어떻게 믿냐는 표정을 지었다. 올라가던 눈썹을 본 파스칼은 가볍게 웃으며 말을 돌렸다. 사냥에 나서지 않아도 마을에는 즐길 거리가 많았다. 말들은 활과 화살집을 안장에 걸고 되새김질하고 있었고, 사냥개들은 그 발치에서 늘어져 마구간의 온기를 즐겼다. 이른 시간부터 열린 좌판, 술집, 노름판. 수십 년간 쓴 사냥제의 목각 장식들은 손때가 닳아 반질반질했고 그 위에 새로 단 종이꽃만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아이들은 어떻게든 어른들의 눈을 피해 종이꽃을 떼가려고 은빛 물 속을 헤엄치는 송사리 떼처럼 주변을 뱅뱅 돌았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렇게 한가롭게 보내는 사냥제는 처음이기도 했단 거였다.
“점심을 너무 이르게 먹었어.”
“그땐 사냥에 나갈 줄 알았으니까.”
“이럴 거였다면….”
“마차에서 서류 챙겨올 걸 그랬단 소리인가.”
“아냐. 그 일 하다가 죽은 귀신 대하는 가정법 좀 그만 써.”
“맞긴 하잖아.”
“이번에는 챙겨오지도 않았어.”
“정말로?”
차를 마시고 시장을 구경하고, 족제비 털을 담비라 속이는 상인을 만나도 오후가 길었다. 테리오스는 물론이고 파스칼조차 갑자기 생겨난 무료함이란 느낌에 당혹을 표했다. 그렇다고 무언가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으므로 시장을 걷는 걸음은 더 느려지기만 했다. 무언가 테리오스의 눈을 괴롭힐 때까지.
매끄러운 표면에 닿아 튀어 오른 햇빛. 테리오스는 금세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좌판 한 가운데 노파가 정성스레 수정구를 닦고 있었다. 노파는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웃는다. 특이한 무늬를 단 숄을 추스르고 손님을 부른다.
“카드 점을 봐 드릴까요? 모르피스에서 들어온 신비한 부적도 있어요.”
시선을 읽은 파스칼이 먼저 변호했다.
“시골이잖아. 이국의 미신은 돈벌이가 잘 돼.”
“나도 알아.”
테리오스가 탁자에 동전을 올려두자, 노파의 뒤에서 나타난 손녀가 웃으며 집어 갔다. 겨울 추위에 부르튼 맨손과 지나치게 짧은 옷 소매가 보였다.
“감사합니다. 손님. 카드를 뽑으시겠어요?”
노파의 지나치게 상냥한 태도도 이해가 갔다. 대개 먼 이국에서 왔단 점쟁이들은 독실한 신자가 몰린 수도를 피해 이런 시골에 자리 잡는다. 그들은 교회의 눈을 피해 사람들을 사로잡아야 하므로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자극한다. 공포. 무슨 일이 날 거란 불안감을 잡고 흔든다. 하지만 노파는 이미 릴캐스터에 정착했을 것이다. 손녀를 키우기 위해선 미심쩍은 부업을 하는 마음씨 좋은 할머니가 더 받아들여지기 쉬운 법이었다. 파스칼은 해보라는 듯 옆으로 비켜섰다. 테리오스가 노파가 흩어놓은 카드 중에서 하나를 골랐다. 노파가 카드를 뒤집어 두 사람에게 보이도록 잘 돌려놓았다. 황금의 잔이 여러 개 그려진 카드였다.
“행복이군요. 행운보다 중요하죠. 큰 경사가 있어도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사람은 불행하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행복은 지극히 작고 소박하더라도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을 얻을 때 느끼는 감정이랍니다.”
노파의 말은 꿀을 바른 듯 달콤했다. 파스칼이 웃는 소리를 가리지도 않고 물었다.
“믿어?”
“믿진 않아.”
“다른 분도 뽑으시죠.”
작게 쑥덕이는 소리를 못 들은 척하는 건지, 정말로 못 들은 건지. 노파가 파스칼 쪽을 불렀다. 파스칼은 앞으로 나섰다가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관둘게요.”
“돈은 이미 지불한 거 알지?”
“그냥. 별로.”
“뭐가 걸려서 그래?”
“너보단 내가 신실한 거지.”
“웃기고 있어.”
하지만 이대로 실랑이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테리오스는 쉽게 포기했다. 미래 일을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동행인이 갑작스레 대화를 절단 내는 게 어디 하루이틀 일이던가.
굉음과 고성이 들린 건 그런 때였다. 반사적으로 소음을 돌아보자, 갑옷에 얼룩진 피가 먼저 눈을 찔렀다. 말라붙지도 않고 경고와 죽음의 색을 띠고 다가왔다. 시종이 헐떡거리며 말을 전했다. 지반이 녹아서 산사태가… 사람이 절벽에 떨어지고, 늪지대에…. 불행을 감지한 사람들이 먼저 통곡했다. 기사를 따라간 소년들을, 누가 챙겨줄까? 당장 혈연의 불행에서 비켜선 떠돌이 사냥꾼들이 먼저 움직였다.
“말을 끌고 오시오! 그리고 밧줄을 준비해. 최대한 많이!”
“여기까지 산 무너지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어. 진흙이 좀 쓸려온 정도겠지.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우렁찬 외침에 수색대가 얼기설기 조직되었다. 테리오스도 발 빠르게 말의 목줄을 풀었다. 천마를 탈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유능한 사냥꾼들은 이슈트반에서 불곰과 싸우고 있을 터였다. 테리오스를 따라 키라트의 목줄을 풀어온 파스칼이 손도끼를 내밀었다. 제 것도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빌려왔어. 이는 좀 빠졌지만 쓸 만할 거야.”
“도끼질도 할 줄 알아?”
“검 다룰 때 하지 말란 짓만 하면 돼.”
과연 도끼는 베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었다. 흙에 떠밀린 나무들은 쓰러져 달리는 사람들의 눈을 꿰뚫기 좋은 위치까지 내려와 있었다. 말을 타고 달리며 그 동력을 끌어와 나뭇가지를 쳐내면, 가장 튼튼한 가지도 삭정이처럼 부러졌다. 노련한 수색대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세 번에 한 번은 쉬었다. 혹시 모를 부상자를 공격할 맹수를 쫓아내고, 길을 잃은 사람들의 비명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슈트반은 지올라모와 다르게 암반이 없다. 땅이 무르니 기운차게 밀과 과실나무가 자란다. 부드러운 땅과 온화한 날씨는 겨울철 얼리고 녹이기를 반복하면 내구도를 잃고, 눈 아래에서 치명적인 곤죽이 된다. 어느 날 산맥을 따라 차가운 용암처럼 사람들을 덮치고 늪지대를 만든다.
그러니 한 번 무너진 땅은 두 번, 세 번 무너질 수 있다.
“테리오스!”
소리 없이 지척까지 다가온 진흙더미가 나무를 휩쓸었다. 근처까지 달려온 파스칼이 키라트의 몸체로 테리오스의 말을 쳤다. 두 말은 덕분에 급격하게 궤도를 틀어 달리는 곡예를 선보일 수 있었지만, 진흙이 더 빨랐다.
“날 잡아!”
“뭘 하려고!”
“도끼를 던져야지!”
왜? 그리고 이미 던졌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테리오스에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테리오스는 뻗는 손을 잡았다. 날아간 도끼가 흑단 나무에 박히자, 쇳소리가 들렸다. 도끼에 묶인 밧줄이 팽하고 길어지며 쓸려가는 두 사람을 붙잡은 건 그다음이었다. 테리오스와 파스칼이란 짐을 잃은 말들은 그들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속도로 피해 고지대로 향했다.
하지만 맹렬한 속도의 진흙이 멎은 다음 사람의 상태는 그다지 볼만한 광경이 아니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건 파스칼이었는데. 검사 시절에도 보였던 비상한 민첩력으로 테리오스를 깔아뭉갰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졸참나무 가지가 뿔처럼 머리칼에 꽂혀 있었다. 파스칼은 흙을 뱉어내고 얼굴을 문질러 닦는 테리오스에게 말했다.
“너 연옥에서 올라온 꼴이네.”
“남 말하지 마.”
“다친 데는?”
“없는 것 같아. 봐야 알겠지만… 용케도 거기서 나무를 골랐군.”
“이 지역 나무들은 대부분 그래. 물에 던져도 가라앉아.”
“칭찬이다. 잘 판단했다고.”
“…난 놀린 거였는데.”
“네 머리에 붙은 가지부터 떼면 그때 받아주지.”
아, 파스칼이 머리를 훔쳐내어 흙탕물을 짜냈다. 절걱거리는 부츠며 몸에 붙어 있는 망토까지. 신선한 흙냄새로 가득 찬 게 묘지에서 방금 꺼낸 귀신이라 해도 믿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겁먹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테리오스가 몸을 일으키자 그제야 흑단 나무의 가지 위에서 나무를 끌어안은 소년이 보였다. 품 안의 새알도 그대로였다.
그 뒤로 소년이 다리에 힘이 풀려 내려갈 수 없다, 하지만 진흙투성이인 두 사람에게 받아지기도 싫다고 벌인 투정은 농담 같지도 않았다.
백발은 다시 봄을 기다려 금발로 물들일 수도 있지만, 꽃으로 장식하는 방법도 있었다. 밤이 되자 마을에서 지핀 불꽃이 수색대의 차가운 뺨을 데웠다. 화톳불은 고기를 구워내고, 젖은 머리를 말렸으며, 흙냄새가 배어 못 쓰게 된 여우 모피에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색을 가져다주었다. 여우 사냥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던 어린 기사들은 붕대를 감고 코를 골며 잠들었다. 말끔해진 얼굴로 돌아온 파스칼에게 테리오스는 잔 하나를 내밀었다. 데운 포도주였다.
“술맛도 안 나잖아.”
“넌 환자다.”
“퍼거스인이기도 하고.”
“차가운 걸 먹을 거면 저녁부터 먹어.”
“그러고 보니 진짜 흑여우를 잡은 사람이 있던데.”
“그런데?”
“신선한 이끼 냄새가 났어.”
떨떠름한 표정에 테리오스가 소리를 숨기지 않고 웃었다. 저녁 식사로 받은 수프를 한 입 떠먹은 파스칼이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먼저 내려놓은 건 테리오스가 뽑았던 카드였다. 그다음으로 둔 건 처음 보는 카드. 소년 하나가 검을 움켜쥐고 불안한 시선으로 후방을 응시하는 그림이었다.
“어디서 났어.”
“선물로 받았어.”
“선물?”
“그 노인. 손녀 말고 손자도 있더라고. 새알은 동생한테 주려는 거였나봐.”
“우연이군. 보답으로 받은 건가.”
“응.”
“무슨 뜻이야?”
“시작할 때라는 건데….”
그리고 말을 기다렸으나, 파스칼은 멋쩍은 표정을 짓기만 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관심이 없으니 궁금하지 않고, 궁금하지 않으니 더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기억도 대충 뭉뚱그려 머릿속에 처박듯이 했겠지. 이 문화치가 살롱의 그림에도, 카드 조각의 그림에도 관심이 없는 건 공평할 정도였다.
“난 항상 별별 일들을 시작하고 있다고.”
“알 만하다.”
“진짜야.”
“카드 점은 나랑 안 맞아.”
“알았다니까.”
수프를 몇 번 더 떠먹은 파스칼이 문득 생각났는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넌 믿어. 좋은 점괘가 나왔으니까.”
불꽃이 길게 늘인 그림자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방향을 바꾸었다. 익숙한 억지에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꾸를 하고 테리오스도 늦은 저녁 식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