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 일로 주무시질 않고.”
“손님이 올 것 같더군.”
“이런, 예언입니까?”
“나는 마녀지 신탁을 전하는 예언가가 아냐. 감이다.”
마녀는 거기 서 있지 말고 들어오라는 손짓으로 손님을 맞았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 누군가 찾아오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그래서 밀회에는 딱 좋다. 현서는 마녀에게 사랑을 고해하지 않았고 마녀도 현서가 진심을 드러낼 때까지 재촉할 것도 없었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니 서로 은밀한 시간에 만나는 날만 길어졌다. 낮에는 육식을 좋아하시니 사슴이나 멧돼지를 잡았다며 부산스레 들고 오다가도 날이 저물면 오로지 사마계만 눈치챌 수 있을 정도의 얕은 발걸음으로 뒷문을 찾았다. 두드릴 필요는 없다. 일부러 할 수 있음에도 기척을 지우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낮에도 오질 않았나.”
“그랬지요. 허나 이 시간까지 머무를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 돌아갔었습니다.”
그 말에 마녀는 바보 같다며 어이없음 반, 웃긴 녀석이라는 반응 반을 섞어 소리내 웃었다. 그래서야 이유를 만들어 내며 오는 것 같지 않느냐고 되물어도 현서는 미소짓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서로의 속내는 이미 다 떠본 지 오래. 각자 선 앞에서 사냥을 가늠하고 있음을 안다. 그러니 마녀도 암살자에게 정체를 묻지 않고 암살자도 마녀에게 왜 미리 죽이지 않느냐고 묻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진심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계는 허례허식을 귀찮아했고 얼굴에 무언가 덧씌워 꾸미는 일은 아주 질색했으므로 포식자로서 어디까지가 진심일지 잠시간의 유예를 즐길 뿐이다.
“허면 지금 찾아올 이유는 만들어 냈고. 들어나 보지.”
사마계는 손님을 안으로 들여 술과 차 중 원하는 것을 고르라 선심 좋게 말했다. 사실 그가 무엇을 고를지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언젠가 한 번, 자연스레 차를 내어주었다가 이제 술은 주시지 않는 거냐고 되묻더란다. 마시고 싶으냐고 물으니 또 그것은 아니라 하고. 말인즉슨 언제나 ‘귀찮게’ 의향을 물어봐 달라는 것임을 제아무리 계로서도 모르기가 어려웠다. 손이 많이 가고 번거로운 사내 같으니. 그러나 마녀는 자신이 그 귀찮음을 기꺼이 감내할 만하다는 생각에까지는 닿지 못한다. 그러니 어째서 용인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답을 구하지 않고 넘겼다. 으레 만사 그런 식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먼 곳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제가 만든 마정석 램프가 수도 램브란티스에서 제법 인기가 좋다더군요.”
“서론이 길어. 자랑을 하고 싶은 게야.”
“하하, 아닙니다. 좋은 값을 치러주셨고 대금과 함께 훌륭한 포도주까지 받았거든요.”
포도는 이 숲에서 나질 않지요. 상당히 손이 가니까. 현서는 함께 들고 온 바구니에서 고풍스러운 종이가 붙은 포도주 병을 꺼내 탁자 위에 곱게 올려두었다. 마녀가 좋아하는 술은 청아하고 맑은 증류주 계열이었으나 좀체 맛보지 못하는 와인이라면 구미가 당길 터. 빤한 속셈이었으나 오히려 보이기에 계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진심은 숨기는 주제에 취기라는 변명이 필요한가. 도발하면 넘어오는 것이 짐승, 위대한 괴물의 왕인 용 그 자체로서 사마계는 기꺼이 인간의 덫에 발을 들였다. 잡히기 전 갈가리 찢어발기며 크게 웃기 위하여.
찻잔은 치워지고 마법으로 끓던 물은 불꽃이 사라지니 차게 식었다. 대신 들소의 젖으로 만든 치즈와 말린 육포 따위가 차려지고 마녀는 간만에 크리스탈로 된 잔 두 개를 꺼내 장식했다. 현서가 숲에 발을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직접 만들었다며 가져온 투명한 유리는 잔에 무언가 채우면 받침대 아래로 용이 드러나는 신비한 장치가 있어,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만든 것이라 했다. 축배는 아니었으나 첫 대작에 쓰기에는 딱 좋았다.
“채우는 솜씨가 상당해.”
“귀족 나으리들을 상대하다 보면 느는 것은 이런 것뿐이라.”
“접대도 네가 맡나.”
“예, 만든 이를 직접 보고 싶어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마정석 물품은 특히나 고급이니. 향은 어떠십니까?”
“흐음.”
현서가 묻자 계는 물음을 멈추고 반보다 약간 덜 찬 잔을 가볍게 들었다. 마녀의 예민한 후각은 검은 과실향 사이에서 젖은 숲 향과 가죽, 희미한 흙 냄새가 섞여 올라오는 것을 놓치지 않았지만 와인 전문가 등이 휘황찬란하게 내뱉는 수식어 따위 그의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나오는 대답은 지극히 간결하다.
“좋군. 마음에 들어.”
“그러면 되었지요.”
암살자와 마녀는 술 몇 잔 따위에 취하지 않았지만 현서는 괜히 약간 취기에 오른 척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평소보다 더 수다스럽고 더 간살부리며 당겨 앉자 마녀도 거기까지는 허락한다는 듯 피식 웃기만 했다. 마정석은 대자연의 마력을 가두어 유용하는 행위, 마녀에게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남자가 유려하게 떠드니 그마저도 들어줄 만해 더 해보라 웃자 현서는 이어서 한 고위 귀족 한 명을 물먹이는 이야기를 새로 시작했다. 왕족이니 귀족이니 하는 계급제는 사마계에게 있어서 무용했으나 그리 콧대 높은 인간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이야기는 즐거웠다. 실력도 없이 자존심만 높은 인간 따위 뭐가 대단하다고 그 자리에 앉혀 놓나.
한 입 두 입 현서의 입으로 대부분 들어가던 치즈가 다 떨어지자 마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은 손님, 게다가 외부인이 제 거주지를 뒤지는 것도 그닥 내키는 일은 아닌 터라 서늘한 창고까지 가는 길은 마녀만이 안다. 그럼에도 와인이 약간 남은 잔을 그대로 두고 간다는 점에서 암살자는 시험당했다. 독을 타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고 하물며 수면제라도 미약하게 발라두면 마녀는 속절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 테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사마계는 그런 내기를 좋아했다. 진실로 목숨을 빼앗으러 온 자인지 궁금해하는 한편, 그의 진심은 어떨지 들여다보고 싶어했다. 살의만 있다면 망설임 없이 베겠다. 그러나 다른 것이 있다면 확인한 후 베어도 늦지 않다. 절대적 포식자의 위치에 서 있는 자로서의 흥미와 오만함이었다.
계는 늦지 않게 돌아왔고 현서는 새로운 종류의 치즈를 환한 얼굴로 반겼다. 단 것을 특히나 좋아하는 것도 그렇지만 맛이 진한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반기는 듯해 넉넉하게 썰어 가져온 치즈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남은 와인을 한번에 들이키자 깊은 숲의 맛이 목 뒤로 넘어가 즐거웠다. 맛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열어 두면 더 맛이 풍부해지는군. 다녀오기 전보다 더욱 맛이 좋아.”
“아, 그러면요.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말해 보아라.”
“혹시 조금 큰 유리병이 있습니까?”
“흠.”
사마계는 고민하다 부엌 찬장이 아닌 선반에서 목이 잘록하고 긴 유리병을 꺼냈다. 어느 모로 보아도 디캔딩에는 좋았으나 그런 용도로 나온 것도 아닐 뿐더러 마녀의 집에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라 현서는 궁금증에 조금 먼지 쌓인 병을 씻고 닦아내며 계에게 물었다.
“어쩌다 사셨는지요.”
“산 것이 아냐. 꽃병이다. 받았지. 쓰기에 맞지 않나.”
“아니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꽃을 꺾어 꽂아두는 일은 좋아하지 않으셨던 게.”
“내 것이 아니었으니까.”
“허면……”
“멋대로 가져와서 멋대로 사용했을 뿐. 내 손으로 쓴 일은 없어.”
거기까지 말하자 현서는 더 묻지 않고 물기를 완전히 말린 후 반 병 정도 남은 와인을 유리병에 부어 찰랑거리며 공기와 접촉시켰다. 오랫동안 병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와인은 맑은 숲의 공기를 만나자 더욱 활기차게 향과 맛을 뿜어내었고 새로운 와인을 잔에 채우자 계는 만족스러운 미소로 핏빛 음료를 삼켰다. 포도의 짙은 맛은 오래간만이니 취하지 않아도 기분이 고양되기에는 충분했다. 현서가 노리던 것도 바로 이것이었다.
그을음이 남지 않는 마정석 램프를 싫어하는 사마계는 마법으로 불을 만들어 띄우거나 기름을 굳혀 만든 초를 사용했고 탁자 위의 작은 촛불은 서로 잔을 들 때나 술을 채울 때, 안주로 손이 갈 때면 심지가 좌우로 흔들리며 서로의 얼굴에 그림자를 빗겨 만들었다. 높은 코와 확연히 두드러진 이목구비는 조각처럼 깊게 어두워 때로는 서로의 얼굴 반쪽은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 촛불의 장점이자 단점. 현서는 계와 자신의 잔에 와인을 조금 더 채운 후 일부러 건배하기를 요청했다. 계는 뭘 또 굳이 그러냐며 의문스러워했지만 더욱 맛있는 와인을 위해서라 혀를 굴리니 또 별것도 아닌 일인지라 그러마하고 끄덕이며 잔을 부딪쳤다. 순간을 노리는 것은 언제나 암살자의 일. 와인 몇 방울이 그대로 튀어올라 계의 소매 위를 적셨다.
“이런. 죄송합니다.”
검은 옷이라 별 티도 나지 않지만 현서는 굳이 보겠다며 일어나 소매 위를 살폈다. 두세 방울, 입을 맞추다 입술을 깨물면 바닥으로 떨어질 양만큼의 와인.
남자의 몸이 여자 쪽으로 기울었다. 다른 곳에 튀지 않았는지 봐 드리겠다며 속살거렸고 마녀는 가만히 그의 행동을 좌시한다. 암살자가 손이 아니라 숨이 닿을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와 눈으로 몸을 훑는다. 기실 촛불 따위로 잡히지도 않을 얼룩이었지만 가만히, 오래도록, 침묵을 밑바닥에 깔고서 시선이 소매를 타고 팔 위로, 어깨를 지나 쇄골 아래 가슴께까지 닿았지만 여전히 마녀는 제지하지 않는다. 이윽고 시선이 아니라 손이 움직였다. 현서의 것이었다.
“아니.”
남자의 손목은 너무나 쉽게 잡혔다. 유령처럼 사람의 목을 찌르고 심장을 거두어 가는 암살자치고는 지나치게 힘없이 가로막히고 만다. 마녀는 손은 잡아주지 않아도 거절의 표시만큼은 명확해서.
“끄지 마라.”
잡힌 손목은 답을 알고 있다. 시선은 어깨 너머 촛농에서 오랫동안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아 올곧은 붉은 빛이 일렁거리며 침묵으로 방을 빛냈다. 마녀는 진심을 알 때까지 고대하며 암살자는 여즉 고할 생각이 없으니 이번 밤의 밀회는 이어지고 새벽의 촛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