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에 잠든 레이디 The Castle and Lying Lady
영지 끄트머리에 자리한 헤일 백작저는 국내 최대 마석의 산지라는 별명이 무색하게 을씨년스러웠다. 발달한 마석 가공 기술로 눈 쌓인 도로에 열선을 깔고 어두운 골목마다 가로등을 설치하면서 헤일령은 수도 한복판에 버금가는 풍요를 누렸다. 북쪽의 척박한 주변 영지와 대조적인 풍경이었으나 질시를 살지언정 침략과 음해로부터는 거리가 멀었는데, 바로 유령 저택의 주인 때문이다. 왕의 깃발을 나부끼던 기사가 말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사는 커녕 문지기나 마부, 시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대문과 멀리 떨어진 저택 사이 장원은 사람의 손길을 거친 지 오래라 잡초가 무성했다. 벽을 타고 오른 담쟁이 덩쿨이 문까지 감싸 열쇠 구멍도 보이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쉰 기사가 목소리를 한 번 가다듬고 크게 외쳤다.
“헤일 백작은 왕의 서신을 받으시오!”
대답 대신 찬 겨울 바람만 불었다. 첨단 마석 기술도 백작저 인근의 외곽하는 무관했다. 해가 지기에 이르나 벌써 공기가 서늘했다. 편지를 전달했다는 증명으로 봉투 겉면에 백작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담벼락을 빙 돌다 보면 개구멍이라도 찾을까 싶어 기사가 발걸음을 내딛을 적.
“누구지.”
소스라치게 놀란 몸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대문의 쇠창살 너머로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인기척도 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추운 날씨에도 뺨은 혈색 없이 창백해 순간 기사는 자신이 유령을 만났나 고민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과 셔츠 자락만으론 눈앞 존재가 인간이라는 증명이 부족했다. 시안 헤일이 신부를 찾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다. 후대를 낳은 마법사가 그 방대한 마력을 자손에게 고스란히 전할까 봐 왕성은 틈틈히 그의 동향을 살폈다. 오늘의 서신에도 같은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 영주가 식을 올리려면 사전에 왕의 허가가 필요했다. 남몰래 첩을 들였나? 인간을 벌레 보듯하는 그 남자가?
“이봐.”
“핫, 실례했습니다.”
고개를 들자 여인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좁힌 채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서신이라고.”
“예, 의심된다면 여기 문장을 확인하십시오.”
녹인 밀랍에는 머리 둘 달린 사자가 찍혀 있었다. 기사가 한쪽 옆구리에 낀 깃발에도 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봉투를 들여다 보던 여자가 창살 틈으로 손을 뻗어 서신을 채가려 하자 기사는 급히 뒷걸음질쳤다. 오른손이 허공만을 휘젓게 되자 여자의 얼굴은 노여움과 동시에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실례했습니다 레이디. 하지만 반드시 백작께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대리인의 수령을 허락할 수 없다는 국왕 폐하의 어명이었습니다.”
아직 시안이 저택에 하녀를 여럿 두었을 때. 대마법사는 하녀에게 대신 서신을 받게 시킨 뒤 아랫것의 실수로 편지가 제게 전해지지 않았다는 핑계로 수도 소환을 거절했다. 백작은 왕명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신뢰를 사려 들진 않았다. 일일이 왕의 결재를 거치지 않고 내정을 다스렸으며 주변 영지나 수도로부터의 초대를 거절하고 두문불출했다. 왕은 아직 그가 유용한 전력이라 확신하지 못했다. 이 마법사가 마음만 먹는다면 시해도 손쉬웠으니. 가까운 귀족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아 모반과 내란과도 거리가 먼 점은 다행이다. 그러나 저택에 틀어박힌 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점도 여전했다. 기사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정체불명의 여인은 어떻게 보고할지 고민하며 슬쩍 운을 뗐다.
“혹 레이디께서는 백작과 친밀한 사이십니까? 문을 열고 저를 백작께 데려다 주시겠어요?”
“녀석은 자고 있다. 알아서 깨워.”
흔쾌한 수락에 남몰래 미소 짓던 기사는 다시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눈 한 번 깜빡일 찰나에 여자가 또 사라진 것이다. “여기다.”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본 순간 우악스러운 손이 뻗어져 나와 멱살을 붙잡았다. 발이 땅에서 떨어지더니 시야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샤사.”
“이번엔 또 뭔가.”
“사신을 만나면 다음엔 걸어서 안내해 주세요. 당신의 존재를 들킬 뻔했잖아요. 이번은 순간이동이라고 변명했지만….”
“그럼 정원 손질이나 해라. 풀이 억세서 걷기 불편하다.”
“…알겠어요.”
시안은 커튼을 걷고 창문 아래 풀밭을 내려다 보았다. 땅에 마법진을 그릴지 골렘을 만들어 정원사 일을 시킬지 고민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으나 샤사라 불린 여자는 오늘따라 유독 수다스러웠다.
“정녕 가지 않을 셈인가.”
“싫습니다. 수도의 무도회 따위… 절 놀리려는 의도니까요.”
“너처럼 재미없는 놈을 뭣하러.”
“세상 물정 모르는 촌뜨기잖습니까.”
지금으로부터 몇 시간 전 수식을 정리하던 시안은 서재 책상에서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선잠을 깨운 것은 경악에 찬 목소리와 사람의 몸이 바닥을 구르며 책과 가구를 쓰러트리는 소리. 창가에서 던져진 남자는 데굴데굴 굴러 책상 앞까지 오고서야 겨우 움직임이 멎었다. 뒤따라 샤사가 창틀에 착륙했다. 시안은 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왕의 기사를 멋대로 들여보낸 것도 모자라 대문에서 3층 창문까지 붙잡아 던지다니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 건가. 상황을 수습하려면 탄식할 시간도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와 옷매무새는 가다듬지도 못하고 시안은 우선 머리부터 숙였다.
“그렇다면 더욱 본때를 보여줘야지.”
겉면 봉투에 이름을 쓰고 일주일 내에 답신을 보내겠다는 약조문에도 한 번 더 같은 글씨가 적히고서야 기사는 수도로 돌아갔다. 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리 단단히 확답을 받아내기는 처음이었다. 잡음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리 수락하는 편이 낫나 싶다가도… 시안은 샐쭉한 얼굴로 샤사를 바라보았다. “제 일에 너무 참견하지 마시지요.” 노크 대신 창문을 열고 사람을 던지는 괴팍한 인물. 처음 나타났을 땐 유리창을 산산조각 냈으니 양반 된 셈이었다. 고집 센 독불장군은 간절히 청해도 내키지 않으면 제 말을 무시했고 힘을 쓰자니 오히려 좋다며 맞섰다. 오늘은 이미 왕성 사람을 설득하느라 진이 빠져 체력이 바닥났다. 평소처럼 입씨름하지 않고 소파에 길게 눕자 손걸이에 내려앉은 샤사가 저를 내려다보며 앞머리를 넘겨 주었다.
“난 그 자의 목적을 알 것 같다.”
“무언가 들으셨습니까.”
“돌아가는 길을 따라갔지. 어찌 그대는 친우도 한 명 없어, 내가 이 저택에 머무른지도 일 년이 다 되어가는데 지금껏 찾아오는 사람이 단 한 명 없었다니.”
“하시려는 말씀은요.”
“말에 실은 자루에 여인들의 초상화가 담겼더군. 원래 그것들도 보여야 했는데 내가 갑자기 창문까지 집어던진 바람에 미처 챙기지 못했지.”
“초상화라고요.”
얼굴 가득 물음표를 띄우기도 잠시. 옛 기억을 거슬러 간 마법사는 스스로 답을 도출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동생의 신랑감을 고르느라 가까운 부인들과 초상화를 주고 받곤 했다.
“설마.”
“그대의 구혼자들이지.”
이 왕국에 음침하고 괴팍하기로 소문난 시안 헤일의 신부를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혼기에 다다른 마법사를 혼인시켜 친왕파의 가계에 편입시키고, 나아가 저택 곳곳 눈과 귀를 두려는 목적이었다.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에 시안은 두 눈을 꽉 감았다. 머리맡에서 울리던 웃음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왔다. 게슴츠레 눈을 뜨니 샤사가 시안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심각한 반응이 기껍고 흥미롭다는 기색이다.
“방안이 있다.”
“즐거워 보이십니다.”
“놀리는 걸로 보이나? 아냐. 말했잖나.”
네 곁에서 돕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다. 익히 들었으나 그때나 지금이나 아리송했다. 사람을 멋대로 휘두를 뿐이다.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질문해도 제대로 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일 년 정도 지켜보니 일부러 감추기보다는 정말 답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구체화하기 전까지는 그때그때 감정과 기분을 따르고. 그렇다 해서 자신이 타인의 충동에 어울려 줄 이유는 없었다. 진정으로 밀어내기엔 티끌만한 망설임이 발목을 붙들었다.
“나를 그대의 정인으로 공표해라.”
“네?”
시안 헤일은 지독하게 외로움을 탔다.
“동시에 나의 정체를 알려. 공표한 이상 내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 샅샅이 뒤질 테니.”
그래서 함부로 락샤사를 밀어내기엔 겁이 났다.
“누가 이유를 묻거든 이렇게 답해.”
지상에 남은 유일한 마법사는 앞으로 수천 년을 살아갈 운명. 지난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가족들은 일찍이 제 곁을 떠났으리라.
“대마법사의 곁에 설 자, 힘과 자격을 갖추어야 할지니.”
힘을 모두 개방하더라도 폭풍 같은 마법을 견뎌낼 자. 같은 세월을 살아가고 죽음과 한없이 먼 존재. 멀리서 온 이방인. 다만 저와 다르게 인간의 태생이 아니라 고독에 문외한이었다. 시안은 그 사실에 안심하면서도 그래서 확신을 잃었다. 자유로운 당신이 나에게만 끈질기게 시간을 쏟겠나. 두 번 남겨졌다간 마음이 망가진다. 바보처럼 똑같은 질문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왜 저입니까.”
당신 또한 이 세계의 마지막 용. 하지만 내가 아니어도 되잖아.
새삼스럽다는 듯 샤사가 눈을 몇 번 깜빡였다. 푸른 눈동자 한가운데의 긴 동공이 그때마다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널 갖고 싶으니까.”
무심코 뱉었으나 이번이 처음이다. 모른다 외의 새로운 답이었다. 예상 밖의 현상에 시안도 잠시 말을 잃었다. 두 사람은 오래도록 서로를 마주보기만 했다. 지상과 하늘, 기원이 다른 두 가지 빛이 시선을 타고 흘러 교차했다. 찰나에 불꽃이 튀었다 사그라든다. 금방 꺼져버린 불씨, 그러나 움튼 들불은 거침없이 퍼져나갈 것이다. 침략자 용은 인간 중 가장 위대한 존재의 운명을 뒤틀어 버렸다. 새벽이 밝아오는 하늘의 빛은 다채롭기에 지상의 빛으로는 이길 수 없고, 당신은 이미 하늘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