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보면 자정이 지난지 한참이었지만 한 마법사와 용은 잠들 줄을 몰랐다. 오늘은 새해, 수도에서 제법 떨어진 마법사의 외딴 탑과 성에서까지 마력의 파동으로 그 활기참을 느낄 수 있는 축제가 열리는 날. 원래 오감이 예민한 용은 둘째치고 오래된 마법사까지 수도에서 사용되는 온갖 마법과 아이템, 폭죽 소리에 아침까지 깨어 있는 편이 낫겠다고 선언할 정도로 온 나라가 부산스러웠다. 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이제 마력에 민감한 존재는 세상에 얼마 남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런 존재를 망각한다. 잊혀지는 존재들이란 언제나 다수의 앞에서 피해입었다.

“샤사. 술이라도 드릴까요.”

“됐다. 축배라면 저녁에도 들지 않았어.”

“하지만 마력 파동 때문에 영 피로하신 게.”

“매해 있는 일이야. 새삼스러운 것도 없지. 게다가…”

이 편이 안심이 돼. 용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서 연인의 품을 꽉 끌어안았다. 왕국은 두렵도록 강대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를 거의 유폐한 대신 재산과 허울뿐인 작위를 주며 심기를 달랬으니 시안은 쓸 데도 없는 금과 은으로 하사받은 땅의 사람들에게 베풀고 그마저도 남은 재산은 오랫동안 방치했다. 그러던 것을 사랑하는 연인이 생겼으니 성을 고치고 다 낡아빠져 먼지가 되기 직전인 가구를 바꾸는 데 쓰기 시작하자 더더욱 아깝지가 않았다. 화려하지는 않아도 좋으나 단정해도 최고급으로. 바깥의 마력을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는 특수한 가공 처리가 된 비단 휘장을 드리운 침대에서 둘은 서로를 안은 채 즐거운 웃음을 속삭였다. 잊혀졌어도 상대가 기억하니 외롭지 않았다.

“…샤사가 그런 말을 하면 가슴이 꾹 옥죄는 것 같아요.”

“하하, 죽을 것 같기라도 하든.”

“글쎄요. 다만 이게 설렌다는 감정인 건 압니다.”

용의 말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사랑이 보이니 마법사도 속절없이 푹 빠졌다. 사랑을 쏟아 주는 이를 배신하는 방법 따위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았어도 알지 못한다. 서투르게 감정을 고해도 용은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인내했다. 대륙의 모든 살아 있는 마법사들 중에서 가장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는 시안 헤일 백작이 사랑한다는 감정 하나를 표현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다는 걸 알면 얼마나 웃길까. 까마득하게 오래 전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는 건 새로 배우는 것만큼 어려웠지만 용은 재촉하지 않았다. 하여 연인이 되고서 지금, 이만큼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제법 정진이라 하겠다.

“으음….”

순간 샤사의 몸이 크게 움찔했다. 마정석을 많이 사용해 선명한 불꽃과 높은 고도를 구현한 폭죽 탓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의 사용 따위 아무런 느낌도 없으나 이런 식으로 인공적인 마력의 폭발은 마법적 감각이 뛰어난 이들에게 찌릿한 정전기 같은 불쾌함을 주었다.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편안하게 쉴 수도 없는 애매한 줄타기에 시안은 영민한 뇌를 몇 차례 굴리며 해결법을 찾아내려 애썼지만 기껏해야 마력 파동을 차단하는 몇 가지 아이템을 고안하는 것이 전부, 원인을 제거하려면 왕국에 쳐들어가 사용을 금지시키는 수밖에 없으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안겨 있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시안은 하책이나마 묘안을 하나 떠올렸다.

“왜 그러지. 괴롭나.”

“아닙니다. 저보다는 샤사가 더 예민하겠지요. 샤사, 저희 나가요.”

“어디를.”

“동쪽으로. 왕국의 최동부까지 갑시다. 가서 일출을 봐요. 새해니까.”

지금껏 수백, 수천 번은 맞아 온 새해건만 한 번도 일출은 본 적이 없었으니 그것을 기념삼아 수도에서 멀어지면 될 일이었다. 왕국의 수도는 서쪽에 위치했고 동쪽으로 갈수록 농경, 광산 산업이 주된 구조로 되어 있었으니 인공적인 마력 폭발도 적을 테다. 한 번에 두 가지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 어찌 묘안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샤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시안이 차근차근 설명하자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새로운 기억을 남기는 건 언제나 즐거웠으니 그에게도 거절할 이유 따위는 전혀 없었다.

간단한 채비를 마치고서 마법사는 지팡이를 들고 날아오를 준비를 했지만 용은 손 위를 가볍게 잡아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곧 거대한 용의 모습이 창문을 넘어 성 위로 크게 떠올랐다. 복슬거리는 갈기 위로 올라타니 잘 꾸며진 정원이 어느새 손톱만해졌다. 구름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가도 전혀 춥지 않았다.

“하하, 불꽃도 여기까지 올라오진 못하나.”

날아올라 수도 부근을 지나자 용과 마법사 아래로 터지는 불꽃이 현란했지만 결국 닿지는 못했다. 왕성과 민가에서 밝혀둔 불이 반짝였어도 그뿐. 결국 다수가 소수를 휘두를지는 모르나 지배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늘의 종족이었으므로 지상의 불꽃은 결국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 머리 위로 아무것도 두지 않자 마침내 고요해졌다.

두 시간 정도를 길게 날아도 용은 피곤할 줄 몰랐고 마법사는 그런 연인에게 종종 구름 아래로 간혹 보이는 마을에 얽힌 전설이나 이야기 따위를 속삭였다. 인간의 이야기도 있었으나 대부분 옛 용이나 요정에 관한 것이었다. 인지를 벗어난 존재는 결국 돌고 돌아 하나의 원으로 뭉치니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건 곧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과 같았다. 서로 영원을 약속하고 곁에 머무르기로 약조했으니 인계에 남은 자들의 몇 안 되는 일일까 싶다.

“샤사. 보세요.”

하늘은 지상보다 더 동이 빨리 튼다. 사실 시간이 다르다기보다는 가리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럴 테지만 인간으로 난 마법사는 그 쪽의 인식이 더 편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확 불어왔지만 추위를 모르는 마법사는 머리카락을 넘기며 시원하게 맞아댔다. 수만 번은 더 본 아침 햇살인데 왜 이리 함께 보는 것만으로 특별해지는 걸까. 사랑이란 참으로 신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일들임에도 소중해졌다. 오늘도 마법사의 길고 긴 삶에서 책갈피로 꽂힐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아름답군.”

“정말 그래요.”

“태양도 그렇지만.”

순식간에 용의 모습이 갈무리되더니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가 시안의 품으로 확 파고들었다. 목 가까이 팔을 감아 끌어안고는 차가운 공기에 닿아 김이 되어 희게 서리는 숨이 가까워진다. 오로지, 사랑으로 한 번 베어졌고 사랑으로 뛰는 심장이 속삭였다. 네가 더 그렇다. 직설적인 칭찬에 마법사는 답할 말을 고르지 못하고 그저 얼굴을 붉히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의 폭풍은 아직 익숙치 못했기에. 다만 대답은 못 되어도 할 수 있는 말을 정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라서. 시안은 허리께에 양 팔을 감아 끌어당기며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감히 행복해서 떨리는 톤으로 대답했다.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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