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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

(2012)
    등장인물
    • 사마계 / Sima Jia / 반트
    • 현서 / Xianshu / 외짱
장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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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미는 비밀을 양분으로 자란다.
미술관에 방문한 아이는 어느 순간 자신이 혼자임을 깨닫는다. 아이의 몸으론 광활한 미술관, 손에 든 건 한 송이 장미. 그때 들려온 걸음걸이의 주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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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예술품이 즐비했다. 현서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유명하다는 미술가나 조각가가 여는 전시관에 줄창나게 따라다녔고 한 번 본 작품은 절대 잊지 않았으나 그런 소년에게도 생경한 미술관은 청보랏빛 눈동자가 빙빙 돌아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이옌’還緣의 작품이라면 제법 유명했으니 4층짜리 전시관을 전부 대여했음에도 관람하는 이들에 치일 정도로 사람이 북적였다. 그도 그럴 것이 미공개 작품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가. 부모님께서 차분히 설명해 주셨던 것 같지만 들뜬 마음에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동생은 아직 나이가 어려 오지 않았지만 기념품점에 예쁜 상품이 있다면 사 가야지. 그 애는 예쁜 걸 좋아하니 화려한 엽서나 손수건이라도 좋아할 테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현서의 나이도 채 10살이 되지 않았지만.

워낙 어른스러운 아이라 소년은 금세 혼자 다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 전시실 안으로 조심스레 걸어들어갔다. 작품 하나하나마다 작가의 말이 조금씩 달려 있었고 미리 건네받은 팸플릿에는 유명 작품의 이름과 위치가 적혀 있어 돌아다니기 편했다. 1층은 화음월상, 총 네 개의 큰 구역으로 나뉘어 작가가 직접 배치를 조정했다고 했다. 한 방향으로 관람하도록 유도하는 일반적인 전시와 다르게 출입구에서 이어지는 중앙의 큰 공간이 있고, 원하는 구역을 좋아하는 순서로 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진 1층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온도에 따라 영원히 꽃이 지었다가 피는 태화관의 〈영원부영원〉이나 현음관의 유리로 만든 푸른 연꽃을 검은 물이 가득 찬 거대한 수조 위에 띄워 감상하는 〈처염상정〉, 보석을 밟고 사랑하는 이에게 달려가는 그림인 〈연연〉이 특히나 유명했으니 눈에 한참이나 담아도 모자랐다. 적월관의 마음을 취하기 위해 몸을 불태워 비상하는 불사조를 그린 〈연뢰〉도 좋았지만 이 전시관에서 가장 기대되는 작품이라면, 역시.

압도적으로 거대한 캔버스에 파묻히는 경험은 아주 오랫동안 남는다. 얼어붙은 동상 흔적이 평생 가는 것처럼.

가로 12m, 세로 3m의 거대한 그림은 북암관의 별실 하나를 다 썼다. 작가의 코멘트로는 이 그림을 볼 때뿐만 아니라 그릴 때의 체온조차도 낮길 원해 여름이면 항상 아주 낮은 온도로 에어컨을 튼 후 얼음장 속에서 그렸단다. 예술은 영원하니 누구라도 작품 앞에서 얼어붙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적혀져 있었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설경. 오로지 흰색과 검은색, 명도가 전부 다른 회색으로만 칠해진 그림의 이름은…….

문득 사방이 조용했다. 별실에 그림을 구경하러 온 이가 저뿐이었던 건지, 운이 좋았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이 그림은 오로지 혼자 보는 것에서 위압감을 느끼도록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현서는 이번 전시를 놓치지 않고 방문하길 잘했단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뒤따라 부모님과 헤어져버린 것이 뭇내 불안했다. 넓지 않은 전시관이고, 전시관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되겠지만……. …그러고 보니 직원이나 다른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로 가신 거지?

“아무도 없나요?”

안내데스크로 향했지만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문은 열리지 않고 방문객이라고는 부모님을 포함해서 한 명도 남지 않았지만 전시관의 노란 불빛은 생생하게 작품을 비추고 있었다. 마치 오픈하기 전 전시관을 모조리 대여한 기분이라 소년은 갑작스레 이 많은 사람이 사라질 리 없다는 진실에서 뛰쳐나가 마냥 신이 났다. 물론 전시 예절은 철저하게 지키겠지만 사람에 치여 아직 작은 키로 잘 보이지 않는 유명한 작품을 독점할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예술품 납품을 전문으로 하는 집안에서 횡재나 다름없었다. 무엇부터 볼까, 북암관을 마저 돌아볼까. 메인 작품은 이미 보았지만 다른 작품도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움이었으니 자그마한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직 작품에 담긴 깊은 의미라거나 작가의 속뜻까지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예술에는 모름지기 가슴을 뛰게 만드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언젠가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면 너무나 즐거울 것 같았다.

별실에서 나와 간이 벽으로 구분된 복도에 서자 현서는 고민의 답을 내려야 했다. 왼쪽으로 갈까, 오른쪽으로 갈까. 관은 전부 이어져 있으니 어느 쪽을 먼저 가도 상관은 없다만은 이 작은 소년은 전시관을 탐험하는 기분에 한껏 열이 올라 있었다. 팜플렛에 간단한 지도가 나와 있었던 것 같으니 세 번 접힌 빳빳하고 반들거리는 종이를 펼쳐 더 마음 가는 곳부터 가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그제야 소년은 고양감을 넘어 불안이 치달아 올랐다. 지도와 보이는 관의 배치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뭔가, 너무 이상한데…….’

전시 도중 아주 특별한 일이나 사고가 있지 않는 이상 이렇게까지 배치를 바꿀까?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모조리 뒤죽박죽 섞인 작품들이 흘끔거리며 저를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마치 미술품이 살아 있는 듯한 감각. 분명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너른 공간에 혼자 있기 때문일 거라며 스스로를 달래면서 어떻게든 팜플렛 지도와 비슷한 공간을 찾아냈지만 있어야 할 작품은 누군가 치워버렸는지 보라색 구분선이 반쯤 사라져 있었고, 마치 대신이라도 되는 마냥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고풍스러운 책상 하나만이 덩그랬다. 안내소라기엔 작고 작품이라기엔 너무 동떨어졌으니 위화감이 도드라졌다.

[ 장미는 곧 영혼. 수확하기 적절한 생명의 형태. ]

책상 위 장미는 방금 막 꺾은 것처럼 싱그러웠고 사람의 체온처럼 따뜻했다. 곁에 적힌 작가의 코멘트는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청보라색 꽃잎은 물기를 잔뜩 머금은 채 피부처럼 부드러워 자칫 잘못하다간 찢어지거나 떨어져나갈 것만 같았다. 이게 뭔지 몰라도 소중히 가져가야 한다는 마음만이 솟아나 전시물처럼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손에 꼭 쥐었고 놀랍게도 뾰족하게 솟은 가시는 소년을 전혀 다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꼭 맞는 주인을 찾은 것마냥 두 갈래 잎이 바람 없이 흔들렸다. 마치 그를 기다려 온 것처럼.

미로 같은 전시관은 이후로도 별세계였다. 사계를 테마로 했다지만 진짜 계절을 건물 안에 구현할 수 있을 리도 없건만. 고개를 돌리면 기어가는 듯 위치가 조금씩 바뀌는 흰 뱀 조형물을 지나 세상에서 가장 검은 도료를 섞어 만들었다는 〈침묵〉 앞에 서자 순간 철벅, 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다른 사람일까 하는 반가움이 반, 혹시 작품을 치고 지나갔나 하는 걱정스러움이 반인 채 고개를 돌렸으나 거기에 사람은 없었다. 잘못 들었나? 목을 가눈 탓에 소년의 흰 머리카락이 〈침묵〉을 배경으로 도드라지게 휘날렸다.

―찰박.

잘못 듣지 않았다. 분명히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액체, 그것도 점도가 있는 것. 에어컨에서 물이 새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품에 닿으면 큰일이 될 텐데, 직원은 보이지 않는다.

―찰박, 찰박.

어쩐지 물소리가 제게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다. 현서는 무심코 전시실 바닥을 내려다본다. 물이 떨어진다면 분명 아래에 고일 것이기에.

―…….

하이옌 전이 열린 전시실 1층 바닥은 회색이다. 태화관과 적월관은 카펫 색으로 분위기를 조정했으나 현음관과 북암관은 그대로 갔다고 했다. 그러니, 검은 색이 보일 일은 없을 텐데. 소년은 무심코 잿빛 바닥을 물들인 것에 손을 뻗었다. 찰박이는 소리의 정체는 이상하게도 작품에서 흘러나온 것 같은 새카만 물감이었다.

한데 소년이 읽지 못한 〈침묵〉의 작품 코멘트는 이러했다. 빛을 끌어당기기에 사람의 눈이 검은색을 검다고 인식한다면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는 때는 언제인가. 타인이 타인을 인지하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면. 검은 도료가 빛을 반사하지 않고 혼자 고립되는 것처럼. 〈침묵〉은 그림이 아니라 조각이다. 만져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검고 검어 무슨 표정인지 추측할 수 없는 사람의 형상. 그런 것에 물든다면 살아있는 이는 어찌 되지. 그러나 채 열 살도 되지 못한 아이가 그런 사실을 알 리도 없고. 일부러 더 낮은 온도로 설정된 에어컨 바람이 조용하게 바닥까지 고였다.

“물러서!”

작품과 다르게 마음을 뒤흔드는 목청이 현서의 귀청을 찢어놓았다. 깜짝 놀란 소년은 화들짝 일어나다가 뒤로 볼썽사납게 넘어졌지만 소리지른 여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괜찮냐는 물음도 하지 않고 오른손을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흰 피부에 무엇이 묻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고 나서야 소년은 강철 같은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이군. 조금만 더 늦었다간 물들었다.”

저를 낚아챈 여인은 북암관에서 본 다른 작품들처럼 새하얘서, 순간 현서는 그럴 리가 없는데도 살아있는 미술품이라고 생각했다. 눈으로 빚은 듯한 피부, 강렬하고 새파란 눈동자, 푸른 입술, 길게 깜박이는 눈꺼풀은 조각처럼 아름다웠다. 누군가 아름답도록 만들지 않고서야 이토록 조형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 무언가 가장 완벽한 걸 만들라 듣는다면 어쩔 수 없이 닮게 될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현서가 멍하니 바라보자 여자는 무슨 일이 났다고 판단했는지 어깨를 흔들어 일깨웠다. 파란 입술 아래 하얀 앞니와 붉은 혀가 벌어지고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이 당연한데도 작품처럼 느껴졌다가 소년은 다시금 목소리에 파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제 이름을 물었고 답해야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러지.”

“아니,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기, 감사합니다. 저는 현서. 문현서라고 해요.”

“사마계다. 여기는 어떻게 들어왔지.”

“들어오다니요? 저는 그냥 전시를 보러 왔어요. 부모님과 함께.”

“아직도 모르겠나. 여기는 네가 있던 곳이 아냐.”

스스로를 사마계라고 소개한 여인은 강렬한 첫인상보다 더 뜻모를 말을 했다. 부모님과 함께 전시를 보러 왔을 뿐인데 있던 곳이 아니라고 하는 저의를 찾을 수 없었다. 사람이 조금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렇게 다른 어른도 만났고.

“모르겠다는 표정이군.”

“…솔직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럼 하나 묻지. 네가 본 작품의 이름을 말해.”

“유명한 건 거의 다 봤어요. 〈영원부영원〉이랑 〈처염상정〉, 〈연연〉, 〈연뢰〉, 여기 와서는 〈설호〉를……”

“그거다.”

“네?”

“그 작품의 이름은 〈설호〉가 아니지.”

〈무상〉無霜. 서리 없는 겨울 낮을 담은 그림의 이름이라 했다. 현서는 제 기억과 완전히 다른 제목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이는 어리나 작품명 옆에는 정확히 이름이 쓰여 있었고 글자를 떼지 못한 나이도 아닌지라 잘못 읽었을 리는 없는데. 하물며 그런 쉬운 한자를 틀릴 리는 없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낯으로 말갛게 사마계를 올려다보자 여인은 몸을 돌려 성큼 발을 내딛었다. 가타부타 설명하길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괜히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아 뒤를 졸졸 따라 쫓았으나 사마계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화가 났을까? 그냥 묻지 말 걸. 기껏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을 만났는데. 게다가……. 생각은 재차 이어지지 않았다. 사마계의 팔에서 맑은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흘러내려 작품을 멋대로 감싸버린 탓이었다.

“자, 잠깐만요! 작품 훼손은……!”

“틀려. 봐라.”

“……”

작품명 〈얼어붙은 자리〉. 사람의 흔적인지 짐승의 흔적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누워 있었는지 중앙만 푹 파인 설치미술이었다. 다만, 그래, 다른 것이 있다면.

“얼어붙었어…?”

“그래.”

작품은 실제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보통 얼음이 가지는 온도도 아닌 사람을 얼려 죽일 수 있을 듯한 냉기. 때문에 사마계가 얽은 푸른 염주가 쩌적쩌적 얼어붙어 살얼음이 돋았고 계는 소년이 현상을 확인하자 능숙하게 염주를 걷어냈다. 무언가 정말 이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나 외의 사람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만.”

“그럼… 그러면, 여기는 어디인가요?”

“더 중요한 일이 있지 않나.”

“…….”

“나가고 싶다면 붙어 있어라.”

화가 난 것은 아니었는지 여인은 선선히 제 곁을 허락했다. 그러나 배려해 줄 요량은 없다는 듯 보폭까지 맞춰 주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 바깥으로 돌아가는 것. 부모님을 다시 만나는 것. 이 이상한 전시관에서… 살아남는 것. 하지만 가장 가지고 싶은 건. 가장 마음을 울리는 건.

“…옆에 있어도 될까요?”

“마음대로.”

“손을 잡는 건요?”

“불편하다. 대응할 수 없게 돼.”

“그러면 옷자락을 잡고 있는 것도 안 돼요?”

대답 대신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허락하면 어디까지 들어오나 하고 제 얕은 심산이 다 들킨 것 같아 이 추운 전시실에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그래도 물러설 마음은 없었다. 현서의 집안은 문 가로 광산 사업을 통해 부를 쌓아 사연 있는 값비싼 예술작품을 사들여 보관하는 박물 사업도 겸하고 있다. 그런 집안에서 작품을 사기 전 마지막으로 고민할 때 결정짓게 하는 단 한 가지 요소가 있다면.

“……혹시 잃어버릴까 봐 소중히 가지고 싶어서요.”

소년은 장미를 손에 꽉 쥐면서도 시선만큼은 여인에게서 떼어놓지 않았다. 네 마음을 울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다정한 조언이 맴돌았다.

주의 : 수해, 인명사고

어느새 사마계는 빈 전시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숨소리와 발자국, 차분한 분위기를 연출할 목적으로 틀었던 클래식이 사라지자 주위는 완전히 고요했다. 온도와 조명, 배경음악으로 꾸며낸 인위적인 침묵과는 다르고 상상 속 진공 상태와 비슷했다. 다른 모두가 증발했다기보단 자신만 오려내 빈 공간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어린 육신은 자연스레 도시에 팽배한 범죄를 연상했다. 납치되어 갇혔다면 할 일은 명확했다. 범인들이 들락거리는 출입구가 있을 터였다.

또래보다 넓은 시야가 전시를 훑었지만 무엇이든 비슷해 보였다. 얼룩덜룩한 물감 범벅이나 직선과 곡선의 연속이 눈을 자극했다. 나무 뿌리를 흉내 내어 수렴과 발산이 반복하는 프랙탈 구조는 본질은 포착하지 못했다. 자연이 내포한 수열을 누락하고 고작 외피만 모사한 게 전부였으므로. 아름답다는 감상에 앞서 낯섦이 선행했다. 계는 자신의 미술적 감각이 태어난 시점에 전멸했음을 새삼 되새겼다. 지금 목적도 예술품과는 무관한 정보였다.

계단과 비상구를 표시한 지도와 층을 나타내는 숫자를 찾다가 기대를 낮춰 팸플릿을 뒤적거렸지만 허사였다. 작품의 이름과 설명, 전시 관람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 외에는 남색 페인트가 벽면을 빽빽하게 채웠다. 바깥 세상의 존재를 증명하는 활자와 기호는 물감칠과 회반죽이 모조리 집어삼킨 모양이었다. 설명문에 간간히 적힌 작가의 이름 ‘하이옌’으로 누구를 위한 전시였는지만 떠올릴 수 있었다.

조사를 거듭할수록 위화감이 더해지자 계는 이 상황을 차라리 납득했다. 현실과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니 자신이 미쳤는지는 의심할 필요 없었다. 계는 모퉁이를 돌며 낯선 건물이 원본과 같은 구조이기를 기도했다. 방위는 본능적으로 파악했다. 막히고 뚫린 부분이 일치한다면 나침반과 지표가 없이도 경로를 판단할 수 있었다.

기억상 마지막은 넓은 전시관이 시야를 틔웠다. 입구의 반대편 문으로는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면 정답이었다. 한 점 행운을 좇아 걸음을 내딛자 신선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계는 재빨리 걸음을 멈췄다. 계산은 진작 끝마쳤다. 출구로부터 바람이 꺾여들어올 이유 없으며 사지를 감싸는 부드러운 미풍은 봄바람을 닮아 부자연스러웠다. 걸음을 멈추는 게 늦었는지 신체는 중력을 따라 천천히 기울어졌다. 입장 직전, 아이는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올려 응전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선택을 비웃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산들바람에 장미 냄새가 섞여들었다.

갑작스레 야외로 끌려나온 건 아니었다. 전시는 평화를 가장하며 계속되었다. 벽면을 타고오르는 가시덩쿨과 곳곳에 피어난 장미는 설치 미술의 측면으로 이해 가능했다. 거니는 길목마다 덤불이 무성했으나 풀이 심기지 않은 맨바닥이 동선을 설명했다. 짙은 꽃내음이 사방에서 풍겨 계는 미간을 찌푸리고 코를 막았다. 내벽을 자극하는 냄새는 건물의 다른 구성 요소처럼 인공 화합물이었다. 누그러트렸던 경계가 새로이 긴장으로 변모했다. 낯선 향기가 독을 품었을지 모를 뿐더러 조향사가 범인이라는 의심이 치솟았다. 계는 일상적인 순간보다 미지 앞에서 날렵해졌다. 분석을 위한 해체에 거리낌 없었고 추론과 행동 사이 시차가 없었다. 강렬한 색과 향이 숨긴 진실을 파헤치려 아이는 허리를 낮추고 몸을 웅크렸다. 허공에 고인 향을 피해 바닥을 기었더니 한결 숨쉬기 편안했다. 낮은 시야가 일깨워준 진실은 한 가지 더 있었다.

‘토끼굴.’

높은 시야에서는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수풀 사이 구멍. 망가진 울타리 틈이나 나무 밑동에서 볼 법한 개구멍이었다. 손으로 흙을 파헤쳐 만든 구덩이를 내다보자 숨겨진 공간이 보였다. 계는 바닥에 더더욱 몸을 밀착시켜 벽 너머로 이동했다. 구멍에서 몸이 완전히 빠져나오고서야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켰다. 꽃 향기는 가셨지만 이 방의 테마도 장미였나 보다. 작고 둥그런 유리 탁자 위 꽃의 여왕은 진귀한 색깔의 드레스를 차려입고 손님을 기다렸다. 손에는 한 장의 쪽지가 들려 있었다.

[ 장미는 곧 영혼. 새파란 푸름으로 기적을 피운다. ]

품종 개량으로 가까스레 이룩한 쪽빛 성취는 기적을 상징했다. 계도 어렴풋이 들었던 기억이 났다. 굴 밑에 떨어진 앨리스가 케이크와 음료로 휴식을 취했듯 소녀 역시 자연스럽게 장미를 집어 손으로 감쌌다. 직전 방에서는 속임수와 함정으로 여겨졌던 장미가 지금은 친근했다. 잃어버렸던 영혼의 퍼즐을 한 조각 찾아낸 기분이었다. 아마 나머지 퍼즐 조각도 전시관 어딘가에 숨겨졌고 모두 되찾아야만 빠져나갈 수 있다. 기실 완성하기 전에는 나가기 싫었다. 제 귀한 파편을 함부로 내버릴리가. 독점과 소유가 익숙한 자는 완성된 자아에도 자긍심이 컸다.

“알겠지? 그럼 출발하자.”

뒤를 돌아보면 짙은 쪽빛의 소년이 계의 시야에 들어왔다. 팔짱을 낀 채 문턱에 삐딱하게 기댄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찼다. 침묵이 길어지자 아주 붉어지기까지 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소전. 어디 있었지.”

“내가 할 말이다만. 계속 여기서 기다렸다고.”

“어째서?”

“그건 네 장미다.”

네가 쥐기 전까지는 의미가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뒤돌은 소전은 다음 방으로 떠났다. 계는 소년을 따라 어둠에 빠져들었다.


“잠깐 멈춰. 그만 뛰라고!”

걸음을 멈추자 불만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말은 잘 듣지. 내 체력도 고려하라고. 알면서 내버릴 작정인가. 계는 익숙한 소음에 반응하는 대신 물을 찾아 움직였다. 저리 힐난하다가도 생수를 찾아 건네면 잠잠해졌다. 무작정 움직이자 생각도 정리되었다. 그는 소전과 함께 전시관을 살피며 몇 가지 사실을 깨우쳤다. 첫째, 내부는 기존 건물 구조를 완전히 벗어났다. 창문 없는 방만 이어져 바깥 상황도 모르겠다. 둘째, 이곳의 기물은 살아 있다. 그림 속 형체는 두 사람이 든 장미를 노렸다. 일단 포획하면 이용 가치가 있어 계는 전면에서 응전하거나 소전을 미끼 삼아 액자에서 쏟아지는 물건을 회수했다. 특히 유용한 조각칼을 빙빙 돌리던 그는 소년의 앞에 돌아와 주저앉은 몸을 내려다 보았다.

“물은 없더군.”

“됐어. 이런 수상한 곳에서.”

“그럼 한 가지 묻지.”

“내게 궁금한 게 다 있다고.”

“어떻게 들어온 거야?”

셋째, 제게는 전시관에 도착하기 전까지 기억이 없다. 소전도 얼굴을 마주하기 전까지 존재를 망각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매일 같은 방향으로 귀가했는데. 근래의 일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유독 비가 세차게 내렸던 날. 이럴 때면 늪에 맑은 물이 차올라 한가운데에서 소용돌이가 쳤다. 계는 그 풍경을 즐겨 지켜보았다. 늙은 버드나무가 감춰둔 길목을 따라 걷다 물기를 머금고 늘어선 가지를 치우면 습지 위로 새가 표표히 날개짓하는 풍경이 보였다. 물가를 에워싼 나무는 안팎의 경계선이었다. 버들잎이 머리 위를 촘촘히 뒤덮어 해의 움직임으로 시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소음마저 깔끔히 잘려나가 안은 바깥 사정과 완전히 격리되었다. 계가 물장구치며 노는 동안 소전은 조급하게 뛰었다. 이리 비가 쏟아지는 날 먼저 뛰쳐나간 계를 원망하며, 소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할 때마다 걸음을 재촉했다. 신발 밑창이 세게 바닥을 밟았다. 평소라면 단단한 땅바닥에 발자국도 안 남았겠지만 강물이 범람한 날의 지면은 물렀다. 손에서 놓친 우산이 허공에 높이 떴다.

“넌 죽었어.”

코끝으로 그날의 물비린내가 감돌았다. 처음엔 착각이나 환시인줄 알았다. 그러나 공간은 서서히 묵직한 습기를 머금었고 천장에서 뚝, 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 호수가 대리석 타일의 자리를 차지해 수면에 떨어진 물방울이 둥근 파동을 그렸다. 차오른 물이 무릎까지 올라와도 계는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소전의 입은 그저 꽉 다물렸지만, 답은 다른 곳에서 간단히 튀어나왔다.

그가 든 검은 장미는 조화였다. 장미를 뺏자 플라스틱 꽃잎 사이 숨겨둔 청보라색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건 누구의 장미지.”

“…….”

“내게도 꽃잎을 훔치러 왔나.”

“너를 만나러 왔다.”

“그럴 순 없어.”

“한 번도 환영해 주질 않으니. 이쪽에서 쫓는 수밖에.”

솟구친 수류가 계를 덮쳤다. 그 순간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배신감이나 공포보단 의문이었다. 물은 언제나 제 편이었으니 등에 칼이 날아오는 지금도 상황을 인지하지 못했다. 적절한 움직임과 선택은 상황과 무관한 3자의 몫이었다.

“잡으세요!”

계는 목소리와 동시에 내밀어진 팔을 밧줄처럼 움켜쥐었다. 그자 당기는 힘보다 강하게 이끌리자 무게 중심이 옮겨졌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천장에 매달린 남자의 품에 파묻혔다. 공중 부양의 트릭은 천장에 꽂힌 칼날이었다. 남자는 대단한 근력으로 왼팔로 칼을 박아넣고 오른팔로 아이를 지탱하고 있었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긴 백발이 흩날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허공에서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계는 직접 활로를 찾기로 했다. 손에 들린 조각칼이 열쇠였다. 거기 맞는 문고리는 없지만 파괴력은 상당했다.. 소녀는 적의 사지를 찢는 심정으로 벽면 거울에 날붙이를 던졌다. 예상은 적중했다. 거울은 칼이 직격한 중앙부터 금이 가더니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히 부서졌다. 방 안에선 거울이고 바깥에서는 유리. 경찰 취조실에서 자주 쓰이는 물건이었다. 세로가 긴 타원형 통로는 사람이 오가기 좁아도 배수구로선 충분했다.

발치에서 넘실대던 수면이 완전히 가라앉자 방 안엔 두 사람이 남았다. 플라스틱 장미에 덕지덕지 붙였던 청보라색 장미 꽃잎은 바닥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계는 부드러운 생화 꽃잎을 주워다 남자에게 건넸다.

“이런. 제게 주셔도 괜찮습니까?”

“당신 물건이잖아.”

“확신하십니까. 다른 분께서 쥐고 계셨잖아요.”

“빼앗았겠지.”

꽃잎을 쥐어뜯긴 남자의 안색은 파리했다. 바다를 닮은 푸른색과 새벽 하늘의 보라색이 섞인 독특한 눈동자는 장미를 그대로 옮겨다 칠한 것 같았다. 증거는 충분했다.

“왜 마다해.”

“친구를 되찾고 싶으실까 해서요.”

“다시 만나면 좋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추모가 끝난 뒤의 일이지. 답을 들은 남자의 눈동자가 부드러이 휘었다. 섬세한 손길로 한 겹씩 이어붙이자 마지막 한 잎만 남았던 청보라색 장미가 온전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와 합류한 후부터 탈출은 순조로웠다. 남자는 신중하게 함정을 살피다가도 계에겐 한없이 자상했다. 하지만 먹물에 물든 것처럼 새카만 오른 검지를 가리키며 사정을 물을 때마다, 그 친절이 일종의 장벽임을 일깨웠다. 남자는 거뭇한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쉿 소리만 냈다. 자신을 설명하기보단 질문이 많았고 계는 교묘한 회피를 알아차렸으나 응수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던 까닭이다.

“이 전시가 추도의 연장선이야.”

하이옌 전을 주최한 수집가는 소전의 모친이었다. 세간에선 죽은 에술가의 작품을 다양하게 모았기로 유명했다. 화가이자 조각가였으며 예술이란 학문의 모든 분야에서 창작을 꽃피워냈던 작가는  삶의 끝까지 정체불명. 무수한 미스테리를 두른 채 세상을 등졌고 상품 가치는 임종 소식과 함께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그럼에도 수집가에겐 수많은 컬렉션의 일부에 불과했다. 선택의 기준은 원작자의 유명세나 평론가의 선호, 예술적 가치가 아니었다. 아들에게 사랑받았을 것. 따라서 계는 누구보다 먼저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마지막 그림은 보았어?”

“아뇨. 입장한 순간 낌새를 눈치채고 잠입했거든요.”

“단 한 사람을 위한 공간에 무모하게 뛰어들다니.”

“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연한 질문을.”

“아뇨. 이곳의 주인은 당신의 친우가 아닙니다.”

다음 방에 도착하자 두 사람의 걸음이 멈췄다. 팸플릿이나 가이드 헤드셋을 든 인파가 삼삼오오 모여 작가의 유작을 감상하고 있었다. 붓을 든 시신으로 발견되었으니 분명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매진했을 작품, 가로 52cm 세로 85cm의 캔버스 <윤회>. 최후의 전시품은 이 방을 단독으로 차지한 주인공이었다. 거친 붓터치는 꼬리를 문 새하얀 뱀의 비늘을 묘사하던 도중 끊겨 있었다.

“소전은 저 그림을 보며 당신을 떠올렸을 거예요.”

“그 녀석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 왜 다른 곳에서 나를 찾지?”

“좋아하면 그렇게 되지요.”

“더 어려운 말을 해.”

“하하. 차차 깨닫게 되실 겁니다.”

로비에서 미아 찾기 방송이 연달아 울렸다. 건물 외벽의 유리에선 저녁놀이 쏟아졌다. 해 질 녘 보호자들이 소리 높여 아이를 불렀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는 목소리는 그날 놀이의 끝을 알렸다. 헤어지는 갈림길에서 아이들은 매일 같은 말을 하며 헤어졌다. 일종의 기원이었다.

“다음에 또 만나.”

“예, 분명 만나게 될 겁니다.”

그때는 제 이름을 알려드릴게요. 계의 또래들은 상대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장성한 사내는 인파에 휩쓸려 시선이 떨어지기를 찰나, 어느새 안개처럼 사라져 있었다. 손에 남은 감촉과 부드러운 온기가 아니었다면 방금까지 일을 꿈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