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에 앉아서 비튼 부부의 읍소를 듣는 왕은 그들만큼 격앙된 표정을 짓고있지 않았다. 타우니스 2세는 왕의 책무를 수행하는 시간을 결코 보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나랏일을 고민할 시간에 숲으로 사냥을 나가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를 다른 사람이 넘보는 것도 불쾌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에게 간언한 신하 셋을 죽이고 난 뒤에야 그들이 올린 충언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 왕에게 조언하기 위해서는 조언 하나 당 목숨 한 개가 필요하다는 말이 돌았지만 누구도 타우니스 2세 앞에서 그 말을 직접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소식을 들은 왕이 지금 당장 시어도어 헌트를 잡아들이라고 했을 때도 그의 명령에 대답하는 근위병들 외에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왕의 입에서 시어도어의 이름이 나왔을 때, 정보에 밝은 귀족들은 상황을 바로 이해했지만 몇몇 어리거나 고결한 기사들은 생경한 이름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묵묵하게 근엄한 얼굴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도 병사들의 손에 끌려온 시어도어 헌트의 얼굴을 본 뒤로는 크게 의문을 갖지 않았다.

시어도어는 찡그린 얼굴로 왕을 올려다봤다.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반감이 가득했고, 그가 고개를 들자 굽이치는 검은색 머리카락이 눈동자 앞에서 흔들렸다. 바로 그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타우니스 2세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들을 몹시 싫어했다.

고대의 전설을 믿는 일부의 사람들은 왕의 혐오에 공감했다. 그들은 며칠 동안 해가 지지 않는 주간을 끝없는 낮, 며칠이 지나도 해가 뜨지 않는 주간을 끝없는 밤이라고 부르면서 낮의 주간에 태어난 금발의 아이를 행운의 상징으로 섬기고 밤의 주간에 태어난 검은 머리의 아이는 불온의 씨앗으로 여겼다. 그러나 기나긴 밤과 낮은 그리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설도 그만큼 빛이 바래 그러한 신앙을 믿는 자들은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18년 전, 모든 역사서에서 열흘을 넘긴 적 없다고 적혀있던 긴 밤이 7주간 이어졌을 당시에는 그들이 퍼뜨린 멸망론에 수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떤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한편, 왕실 사정에 해박한 자들은 왕의 증오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쉽게 짐작했다. 왕의 아버지, 선왕 타우니스 1세는 과거, 불길한 음모론에 시달리면서도 마흔 번 째 밤에 태어난 첫째 아들, 일카이를 극진히 아꼈다. 일카이는 왕비인 이솔리나가 첫 번째 남편을 낙마 사고로 잃기 전에 밴 아이였다. 게다가 검은 머리로 태어났으니 많은 사람들이 일카이의 존재를 불길하게 여겼다. 그러나 타우니스 1세는 왕비를 깊이 사랑하여 그의 첫째 아이까지도 왕자로 책봉했고, 왕자가 나이를 먹을수록 아내를 사랑하듯 아이를 사랑했다. 두 번째 타우니스는 일카이보다 2년 뒤에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선대 왕이 병상에 누워있는 날까지도 형에게 빼앗긴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살았다. 그는 형과 형의 검은 머리카락을 시기하고 미워했다. 그래서 타우니스 1세가 서거한 날, 자신의 칼로 형을 찔러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날 세상이 그의 만행에 경악했으나 아무도 그를 막아서지는 못했다.

그 뒤로 3년이 지났지만 타우니스 2세는 조금도 온건해지지 않았다. 왕의 염오는 지금도 건재했고 그를 따르는 신하와 기사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사면받지 못했다. 그래서 신하들은 그가 시어도어의 출생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다. 누가 그를 낳았고 언제 태어났는지 아는 게 아니고서야 한낱 방랑자 용병이 그의 눈엣가시가 될 이유가 없었다. 요컨대 그의 해묵은 원한이 시어도어에게까지 불똥이 튄 것이다.

시어도어는 그날로 지하감옥에 갇혔다. 쇠창살 바깥의 벽에 듬성듬성하게 기름등잔이 걸려있기는 했지만 미약한 빛은 감옥 안까지 밝혀주지는 못했다. 바깥에 선 간수는 한 명뿐이었다. 그는 간간이 감옥 안을 살피러 와도 시어도어와 말을 섞지는 않았다. 그래서 감옥은 어둡고 조용했다. 그리고 축축했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어.'

시어도어는 자신이 정말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왕성에 온 건 단순히 다른 마을에서 여관 주인의 부탁을 받아서였다. 그는 몇 번 그 여관에서 신세를 졌는데, 이번에 갔을 때는 매번 술과 음식을 나르던 그의 딸이 보이질 않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딸의 안부를 물은 것을 시작으로 그들은 주인의 딸이 왕성에서 허드렛일을 하게 됐는데 요즘은 연회 준비를 하느라 편지 한 통 보낼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쁘다는 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대신에 그의 푸념을 들어주는 대가로 일행 모두가 시원한 맥주를 한 잔씩 선물받았다. 주인의 말은 의뢰로 끝났다. 그들은 충분한 대가를 받으면 무슨 일이든 했고, 때마침 그의 딸에게는 며칠간 일을 도와줄 일손이 필요했다. 최종적으로 왕성에 가게 된 건 시어도어와 빌헬름이었다. 어차피 다른 의뢰 때문에 왕성에 가야 했던 빌헬름과는 달리, 시어도어는 사실 왕성에 가는 게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다. 수도 같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여러 모로 귀찮은 일이 자주 생겼다. 그런데도 여관 주인의 의뢰를 받아들인 건, 어디든 사람은 많은데 스스로가 유별나게 군다고 느껴진 까닭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왕성에는 그 남자가 있었다.

그는 감옥 바닥에 누워서 에드워드 노턴을 떠올렸다. 그는 시어도어의 재판 때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뒤편에 서있었다. 왕은 시어도어를 내려다보면서 굶주린 비튼 경이 목숨을 잃은 그날 새벽에 어디에서 무얼 했느냐고 물었다. 시어도어는 그때 대장간에서 부탁했던 말 편자를 건네받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 그에게 편자를 내어준 대장장이는 물론, 같은 시간에 대장간에 있었던 수련생들 모두가 입을 모아 시어도어를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다. 곧이어 머리가 매달렸던 성벽 근처에서 그를 보았다는 목격이 쇄도했다. 시어도어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처음 감옥에 갇힐 때부터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리오라의 망나니 폭군은 그가 산 채로 왕성을 나가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어도어의 예상대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이 끝나고 감옥에 도로 수감된 시어도어는 돌아오자마자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을 고민했다. 어떻게든 간수를 쓰러뜨리고 감옥 밖으로 나간대도 곧장 탑 일층에 있는 감시 초소 앞을 무사히 지나야 탈출할 수 있었다. 보초병의 눈을 피해 마구간까지 가면 말을 훔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빼돌리면 근처 병영의 병사들에게 들킬 위험이 컸다. 그리고 성문이 열려있을지도 미지수였다. 재판장에서 떠드는 몇몇 수다쟁이 귀족들 덕분에 시어도어는 그가 잡혀들어온 이후로 며칠 동안 밤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얼마나 더 지났을까? 어두운 감옥 안에서는 시간 감각도 흐려졌다. 며칠이 지났건, 바깥에 해가 높이 떠있다면 그가 들키지 않고 탈출하는 건 더 어려워질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여기 가만히 앉아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이 나라를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던 게 패착이었다.

'이걸로 된 거야. 여기 남아있을 이유도 애초에 없었어….'

그는 줄곧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허술한 핑계를 대면서 이 나라에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번으로 끝이다. 시어도어는 북쪽의 눈을 닮은 새하얀 눈동자를 떠올리다가 눈을 감았다.

그때 간수가 감옥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쇠가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간수가 자물쇠를 열었다. 시어도어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는 간수가 있는 쪽을 노려보았다. 그의 예상대로라면 형을 집행하는 날까지는 아직 시일이 남아있었다. 계산이 틀렸나? 아니면 왕이 마음을 바꿨나? 어느 쪽이든, 지금이 탈출할 마지막 기회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시어도어는 등불에 의존해 간수가 어떻게 무장을 하고 있는지 살폈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지하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안쪽에 울린 까닭이다.

자물쇠를 쇠창살에서 분리한 간수는 쇠문을 열고 그를 향해 말했다.

"너는 이제 자유다. 어디로든 가라."

"뭐?"

시어도어는 간수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마음에 안 드나?"

간수보다 훨씬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그에게 대신 답했다. 남자가 다가오자 간수는 그의 뒤로 물러나 섰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시어도어를 올려다보면서도 마치 내려다보듯이 그를 흘겨보았다.

"네놈은 운이 좋은 거야. 노턴 경의 자비가 너를 살렸다. 이제 집 나간 개처럼 네 주인에게서 멀리 도망치기나 해."

그의 말을 들은 시어도어는 감옥에서 나와 곧장 노인의 멱살을 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설명해."

노인은 시어도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했는지, 그에게 멱살을 잡히고는 켁켁거리다가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로, 하늘과 땅이, 반대로 뒤집힌다. 너, 너같은 천출의 행방 따위는 아무도……!"

시어도어가 손아귀에서 힘을 풀자 그가 뒤늦게 시어도어의 손등을 치듯이 밀어냈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아."

노인은 이를 갈면서 말했지만 그가 다시 자신을 잡아챌까봐 경계하듯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시어도어는 문득 그의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를 뒤흔드는 불안은 다른 데서 왔다. 그는 위로 가야 했다. 시어도어는 지하 계단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지하 계단 역시도 캄캄했고 어떤 계단은 이끼에 미끄러웠지만 그는 한 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 올랐다. 시어도어의 머리에는 조금이라도 빨리 지상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며칠만에 나온 바깥으로 나오자 환한 대낮의 햇살이 그를 반겨주었다. 그가 재판을 받으러 가던 날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게 정말 낮인지, 아니면 밤이 왔음에도 해가 지지 않은 거짓된 밤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는 계단 위에 서서 잠깐 동안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곳은 아수라장이었다.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시 초소에 남은 병사들은 제각기 창과 검을 들고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시어도어를 발견했지만 그에게 주목하지 않고 전혀 다른 쪽을 향해 창을 들었다.

"폭정을 일삼는 왕이 과연 정당한가!"

누군가가 기치를 높이 세워들면서 외쳤다. 그러자 무수히 많은 병사들이 찬동하면서 기수의 말을 따라 읊었다.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은 반면, 그들과 맞서 싸우는 병사들은 겉보기에도 공격을 막아내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다. 시어도어는 몇몇 깃발을 알아보려고 해봤지만 바람이 불지 않는 탓에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병영 앞을 지났다.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곧 마구간이 나왔다. 시어도어는 그 앞에서 멈춰섰다. 반란이 일어났다면 어떻게든 반란군이 성문을 열어젖혔을 것이다. 그들과 반대 방향으로 나가는 게 쉽지는 않을지라도 이 소란을 틈타서 탈출하는 건 결코 요원한 일로는 보이지 않았다. 왕성이 고요와 평화에 잠겨 있을 때보다는 훨씬 좋은 기회가 그에게 찾아온 것이다. 운이 별로 없는 시어도어로서는 간만에 맛보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에게 안장을 올리는 대신 달리기 시작했다. 왕성을 나가는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그는 요 며칠간 몇십 번도 넘게 탈출을 계획하고 상상하면서 지금도 성밖으로 나가는 길을 눈을 감고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상상에서 그는 창고를, 하인들의 숙소를 지나지 않았다. 예배당 안으로 도망치는 사람들을 지나쳐 달리는 것도 상상에선 없었다. 그가 달리는 길은 성의 중심부로 이어져있었다. 그가 근위병들에게 끌려갈 때도 이 복도를 지났다. 사람들은 그를 지나치면서 고상한 척 입을 가리고 죄인에 대한 이야기를 작게 수군거렸다. 지금은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정신 없이 복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노인은 어째서 에드워드 노턴의 자비가 자신을 살렸다고 말했을까. 이제는 그를 떠나 절대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날 생각뿐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들은 뒤부터 시어도어는 정반대로만 달리고 있었다. 성문을 향해 달렸다면 성벽 근처에 도달하고도 남았을 시간에 그는 왕성의 복도 끝에 서있었다. 대알현실의 문 앞에 사람이 둘 쓰러져 있었다. 망토를 보니 왕의 친위대였다. 시어도어는 허리를 숙여 그들을 살피고는 두 사람 모두 단칼에 베어 절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시어도어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앞쪽의 문을 바라보았다.

시어도어가 청동문 가까이 다가가자 문 테두리를 장식한 부조가 눈에 들어왔다. 문의 꼭대기부터 밑바닥까지 빼곡하게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 손에는 동그란 방패를, 다른 한 손에는 창을 들고 격돌하여 서로를 찔러 눕히고 있었다. 그러나 시어도어는 이 문이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그 위에 튄 선명한 핏자국을 보다가 걸음을 마저 옮겼을 뿐이다. 그는 문 안쪽에서 자신이 찾는 답을 만나기를 바라며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시어도어가 제발로 대알현실 안에 발을 들이자, 안쪽 벽 높이 위치한 장미꽃 무늬 창에서 낮의 햇살이 들이쳤다. 그는 눈부신 빛에 눈을 찡그렸다가 얼굴 위로 오른팔을 들고 차양을 만들었다. 눈 앞을 가렸던 팔을 위로 올릴수록 마치 눈을 뜰 때처럼 시야가 차츰 넓어졌다. 돌로 된 바닥에는 길게 융단이 깔려있었다. 시어도어의 시선은 융단을 따라 자신의 발치에서 알현실 끝까지 행진했다. 바닥에서 튀어나온 단을 따라 고개를 들자 그 위로… 바닥에 엎어지듯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그의 몸 뒤편으로 햇빛에 빛나는 황금의 왕좌가 보였다. 그리고 그보다 왼편에 곧게 선 두 발이 있었다. 이제 시어도어의 팔은 막 그의 눈썹 위를 지나고 있었다.

이 순간에 시어도어는 불현듯 재판이 끝나고 에드워드 노턴이 지하감옥까지 내려왔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표정만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에드워드는 창살 안으로 자신의 손을 밀어넣고는 시어도어의 손을 잡았다. 시어도어는 자신의 손등 위를 지그시 누르는 그의 손가락의 서늘함을 느꼈다.

"내가 어떻게든 할 테니,"

그러나 시어도어는 그의 말의 서두를 듣자마자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아니. 당신은 못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시어도어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그는 에드워드가 자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랐지만, 이 이상으로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가 생각하기에 에드워드에게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타우니스 2세의 기사였다. 시어도어는 에드워드의 사명감이 낡아빠졌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의 신념을 배반하지는 않았으면 했다. 그가 아는 에드워드 노턴이 바로 그런 것들 위에서 비로소 세워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혹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기우에 불과하고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지도 몰랐다. 시어도어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자신이 착각하지는 않을지 쉼없이 경계했다. 그러면서도 감옥에서 눈 감을 때면 에드워드가 자신의 손을 잡았던 순간을 떠올리며 잠들었다.

쓰러진 남자의 상반신은 카펫 위에 있었으나 그의 다리는 돌바닥 위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 밑으로 붉은 피가 흘러나와 고여있는 모습이 마치 카펫을 옆으로 길게 잡아 늘린 것 같았다. 화려한 망토 위로 피에 젖은 금색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고, 시어도어가 며칠 전에 보았던 타우니스 2세의 고집스럽고 악독했던 얼굴은 이제 경악에 찬 표정 그대로 완전히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남자, 에드워드 노턴은 검을 든 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의 강철 판금 갑옷과 금색 술이 달린 하얀색 망토에 튄 핏자국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가 든 검의 칼날을 따라 핏줄기가 흘러 바닥에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지만, 에드워드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타우니스 2세의 머리 옆에 떨어진 왕관이었다. 왕관을 내려다보는 에드워드의 눈에서는 그 단상 위를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을 유혹했던 탐욕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고상처럼 그 위에 조용히 서있기만 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려 문쪽을 바라보았다.

시어도어는 그의 모습을 발견한 그 순간부터 줄곧 에드워드만을 보고 있었다. 에드워드도 시어도어를 보았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시어도어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작은 혼란을 엿보았다.

'내가 여기에 와서 놀란 거야.'

에드워드는 죽은 왕을 향해 겨누고 있던 검 끝을 바닥으로 내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했다."

그의 말을 들은 시어도어는 기가 막혔다. 지금도 이 건물 밖에서는 그를 따르는 반란군들이 충성파를 제압하며 왕성을 차근차근 장악해가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한때 왕을 따르던 기사가 주군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검으로 그의 심장을 찔러 살해하고는, 방금 전까지 지하감옥에 갇혀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죄수를 보고서 한다는 첫마디가 고작 걱정한다는 말이라니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는 에드워드를 향해 무어라 쏘아붙이려고 했지만, 막상 입을 열자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그의 등 뒤로 사람들이 몰려왔다. 몇몇 병사들은 시어도어를 의심스럽게 쳐다봤지만, 그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무장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금세 신경을 껐다. 이제 그들을 포함한 모든 병사들이 에드워드를 보고 있었다. 병사들은 앞으로 나아가 에드워드 노턴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런데도 시어도어는 그 소리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한순간에 귀가 먼 것처럼, 대알현실을 가득 채운 익숙한 이름이 시어도어에게는 그저 웅웅대는 메아리로만 들렸다. 병사들은 카펫의 중간에 도착하자 그 이상 단상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 모습이 흡사 왕을 대하는 듯 보였다.

뒤늦게 대알현실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아직 에드워드의 말을 한 마디도 듣지 못했다. 그가 속삭인 말을 들은 건 오직 시어도어 헌트 뿐이었다. 이제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시선을 갈구하고 그의 선언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시선은 군중 그 너머를 향해 있었다. 그는 그곳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침내 에드워드가 검을 천장을 향해 치켜들었다. 그의 검 끝이 햇빛에 눈부시게 반짝였고 그 아래로 핏방울이 거꾸로 흘러내렸다. 강렬한 빛은 그의 칠흑같은 검은색 머리카락마저도 일순간 사금처럼 밝게 비추었다. 그가 검을 쥔 손을 위를 향해 뻗는 잠깐 동안, 약속이라도 한듯 침묵을 지키던 사람들은 이제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열화 같은 환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시어도어는 그들의 열기에 합세할 수 없었다. 그는 서늘한 창이 심장을 관통하고 지나간 듯한 감각에 몸서리를 쳤다.

'너무 멀리 와버렸어.'

그는 자신이 너무 한참을 거꾸로 달렸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더는 이곳을 떠날 수 없으리라는 우울한 확신이 들었다.

그날 리오라에는 열흘만에 다시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해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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