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하지만, 그건 어렵겠는데요."

「내 말을 거역하는 게냐?」

가니메데는 용도 눈살을 찌푸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카론은 저랑 같이 마을을 떠나온 제 첫 친구인걸요. 고작 보물을 위해서 친구를 죽일 수는 없어요."

드래곤은 가니메데의 대답을 듣고 눈을 돌려 카론을 쳐다보았다. 재물이 이미 저울 위에 오른 이상, 한 사람만 평화를 바란다고 해서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론도 이제는 드래곤을 쳐다보고 있었다.

"길리투스의 책에서, 용은 인간의 탐욕을 시험한다는 대목이 있었죠. 용이시여, 저희는 그런 단순한 꾐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는 이어서 그 뒤에 알 수 없는 문장을 구사했다. 가니메데는 그가 마법으로 용을 공격하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그 뒤로 빛이 쏘아지거나 돌이 날아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드래곤이 입을 열자 가니메데도 자신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우선 드래곤은 껄껄 웃었다. 목소리가 좀 크긴 했지만, 드래곤의 말은 이제는 걸걸하고 장난기 있는 할아버지 같이 좀 더 친숙한 어조가 되었다.

「아직도 용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인간이 이 땅에 남아있다니, 흥미롭구나.」

「네 말대로다. 정의로운 자와 현명한 자여, 너희에게는 자격이 충분하도다. 따라오거라.」

드래곤은 육중한 몸을 반대로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가니메데와 카론은 평소보다 좀 더 빨리 걸어야 했다. 충분히 놀랐을 법한 일이었는데, 두 사람 모두 그렇게 깜짝 놀란 얼굴은 아니었다. 카론은 지금까지도 눈앞의 상위 존재가 무슨 속내인지 경계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걸 알아채고도 드래곤은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그의 말에 가니메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레어는 그렇게 넓지 않았고 이 바깥쪽은 평범한 숲이었다. 드래곤을 만나본 게 이번이 처음이라지만, 가니메데는 이곳이 그렇게 눈길을 끌 만한 장소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여기를 보금자리로 택한 이유가 있나요?"

「어떤 마을을 지켜주기 위해서였지.」

"마을?"

카론은 드래곤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주변을 돌아다닐 때 늘 지도를 살폈지만, 이 근처에서 두 사람이 의뢰를 받았던 마을 외에는 거주지가 있다는 표시를 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드래곤이 지키려 드는 마을이라면 그곳이 어떤 곳이든 평범한 지도에는 그려지는 일 없이 어딘가에 꽁꽁 숨겨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드래곤은 그들이 마을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곳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에 가니메데가 처음에 물었던 오래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이제 마을은 위험하다.」

"당신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나로는 해결할 수 없어. 그래서 너희를 불러들인 것이다.」

가니메데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가 마을을 지키면 되는 건가요?"

고작 사람 둘이 힘을 보탠다고 마을을 지키는 경비가 그렇게 튼튼해질까? 드래곤만으로도 부족하다고 하는데? 자연스럽게 의구심이 생겨났지만 드래곤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너희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은 그 말을 할 때 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다시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카론은 강인한 회색 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의 등을, 그 다음에는 튼튼한 다리를 보다가 마지막으로 사람 한둘은 쉽게 찢어발기고도 남을 만큼 날카롭고 거대한 발톱을 보았다. 그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저희가 오기 전에도 사람들이 온 적이 있었습니까?"

「데리고 온 적 있었지.」

용은 쉽게 수긍했다.

"그들은 지금?"

「답을 듣고 죽였다.」

가니메데는 겨우 탄식을 삼켰고, 카론은 묵묵히 몇 사람 정도가 드래곤의 손에 죽었을까 생각했다. 필경 이 근처 어딘가에 인골이 널려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가니메데 앞에서 꺼내지는 않았다. 적어도 방금의 대화로 두 사람은 이 근처에서 일어난 이상현상의 원인만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절벽 위의 그리핀들도 용 때문에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주변 마을에서 드래곤의 목격담을 들은 적은 없었던 걸로 보아 드래곤은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마법을 두르고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짐승들은 인간보다 훨씬 기민했다. 최근에 이 주변에 있었던 일들은 분명 드래곤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 그럼 그를 이토록 움직이게 만든 마을은 대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 걸까?

드래곤이 멈춰선 곳은 아무것도 없는 평지였다. 풀 한 포기 자라나지 않은 공터는 작은 황무지로도 보였다. 그러나 드래곤이 한쪽 앞발을 들고 무어라 외우자 정중앙에 대뜸 나무 한 그루가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였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예전이라면 가니메데도 덩그러니 선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난해한 수수께끼에 빠진 사람처럼 고민해야 했겠지만, 카론과 다니면서 겉보기에는 숨겨져있는 문이나, 문의 역할을 하는 지형지물 등을 몇 번 만나본 지금은 달랐다.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 거죠?"

가니메데는 성큼성큼 나무 앞까지 걸어갔다. 물론 바로 앞까지 도착했을 때에는 무턱대고 나무에 발이나 머리부터 박는 대신에 침착하게 손을 내밀어 나무 기둥을 더듬으려고 해보았다.

그러자 그의 손은 물의 장막을 지나듯 나무 껍질을 통과했다. 가니메데는 나무에 파묻힌 자신의 손을 신기하게 쳐다보다가, 발을 떼고 나무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다. 가니메데를 따라 들어가기 전, 카론은 조용히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제아무리 마법사라고 한들, 눈을 보는 것만으로 마음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카론도 드래곤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도 드래곤은 위대한 존재였다. 물론 그가 알고보니 사악한 용이라는 숨겨진 진실 따위가 드러나는 날이 온다면 한순간에 뒤집힐 존경심이었다.

"발 밑 조심해, 되게 울퉁불퉁해."

"아. 고마워."

나무 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벽과 바닥 모두 나무 뿌리가 복잡하고 얽히고 설킨 흙벽이었는데, 그 안을 걷고 있노라면 꼭 동굴 안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높이도 그렇게 높지 않아서 카론과 가니메데는 허리를 숙인 채로 한발 한발 앞으로 내디뎌야 했다.

앞서 걷던 가니메데가 먼저 이 기나긴 터널의 끝을 알렸다. 앞쪽에서 빛줄기가 새어들어왔다. 그리고 가니메데는 마법이 걸린 나무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그 자리에 서서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가니메데?"

그를 따라 밖으로 나온 카론도 뒤늦게 바깥의 풍경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숲속에 서있었다. 주변을 한가득 채운 나무들은 그들이 알던 나무들과는 다른 빛깔을 띠고 있었다. 보라색의 거대한 잎을 가진 나무도 있었고, 오색으로 빛나는 주먹만한 열매가 가지마다 풍성하게 달린 나무도 있었다. 은방울꽃처럼 한 줄기에 여러 송이의 꽃을 늘어뜨린 식물은 그들의 발소리에 보란 듯이 줄기를 둥그렇게 내리며 자신의 미모를 과시했다. 꽃나무에서도 처음 맡아보는 짙은 향기가 났다. 가니메데의 발치에 다가왔다가 재빨리 다른 먼곳으로 뛰어간 작은 동물은 다람쥐를 닮았지만 그보다는 귀가 길었고, 두 사람이 주변을 관찰하는 동안에 알록달록한 긴 꽁지를 지닌 새가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불렀다. 카론도 가니메데도 이런 숲에 와본 적이 없는 것은 물론이요, 어느 노래나 문헌 속에서도 이런 풍경에 관한 이야기를 보고 들은 적이 없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앞으로 작은 무언가가 날아왔다.

"손님이잖아!"

"손님?"

"손님?"

손바닥만한 크기에 뾰족한 귀를 가지고 꽃잎과 나뭇잎을 옷 삼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그들은, 바로 픽시들이었다! 처음 날아온 몇 명의 픽시들 뒤로 열 명이 넘는 픽시들이 날아와 그들 주변을 맴돌고 수선을 떨기 시작했다. (가니메데는 환대받았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카론은 그들이 좀 더 차분하게 응대해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 안녕하세요."

"말했어!"

"안으로 들어와, 손님!"

"우리 집으로!"

"안 돼, 우리 집으로!"

"너희 집도 너희 집도 안 돼! 물론 내 집도 안 돼! 손님들은 너무 커. 광장으로 모셔야 해."

"광장!"

"광장으로!"

한 픽시가 앞장서서 그들을 광장으로 안내했다. 카론은 자신의 머리 위에 앉으려는 픽시를 예의바른 손동작으로 물렸고, 가니메데는 자신의 어깨에 픽시 한 명이 앉은 줄도 모르고 주변 경치를 구경하면서 걷고 있었다.

픽시들이 사는 숲에는 사람 키만한 건물이 여러 채 지어져 있었는데, 안은 다층 구조인 것 같았다. 그 외에도 나뭇가지 위에 세워진 단층 집도 있었고, 어떤 집은 나무의 굵은 가지에 끈으로 매달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모든 픽시들이 그들에게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픽시들은 방문객을 낯설어하면서도 몹시 반겼다.

그들이 광장이라고 말한 곳은 동그란 공터였다. 사람으로 치면 원형 경기장이나 무대처럼 동그란 공터를 중앙에 두고 자그마한 의자가 겹겹이 놓여 있었는데, 키 큰 성인 남성 두 명이 보기에는 거의 장난감 의자로 보였다. 두 사람이 다시 픽시들에게 끝없는 환영 인사를 받기 전, 한 픽시가 두 사람 앞으로 날아왔다. 목에 노란색 꽃을 마치 케이프처럼 거꾸로 꽂고 있는 픽시였다. 그가 나오자 다른 픽시들이 금세 조용해졌다. 물론 침묵은 잠깐에 불과했고, 로라, 로라! 로 그들의 외침이 통일되었을 뿐이다. 모든 픽시들은 로라라고 불린 그 픽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노란 꽃의 픽시가 말했다.

"와줘서 고마워요. 다들 사람을 오랜만에 봐서 들뜬 모양이네요. 놀라지는 않으셨나요?"

"괜찮습니다."

"다행이군요. 저는 노란 튤립에서 온 로라라고 합니다, 짧게 로라라고 부르세요."

"반가워요, 로라. 저는 가니메데 테일러예요."

"카론 유스티오입니다. 평소에는 이곳에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나 봅니다."

로라가 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세논이 들여보내주지 않으면 아무도 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이미 그를 만났겠군요."

"크세논…?"

로라의 발음은 거의 '제논'처럼 들렸다.

"저희를 지켜주는 드래곤입니다."

"무서운 협박을 하던데요."

카론이 농담삼아 이야기했지만, 로라를 비롯한 픽시들은 바깥에서 드래곤이 어떤 시험을 치르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그래서 카론도 그 이야기를 더 꺼내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로라가 크세논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줄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로라는 마을 안내를 시작했다. 그들은 얼떨결에 픽시들이 자신의 이름과 집을 소개하는 기나긴 여정에 동참하게 되었다.

픽시들의 마을은 작고 아담했지만 인간들이 사는 곳과 크게 다르지 없었다. 대신에 픽시들은 재화 없이 모든 것을 물물교환으로 해결했고 날카롭거나 위험한 물건은 이 마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 나뭇가지 같은 건 어떻게 자르냐고 물어보니, 바람에 꺾여 떨어진 걸 쓴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들은 오랜만에 온 인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어떤 픽시는 자신의 집을 가지 위로 올려주길 바랐고, 다른 픽시는 집의 지붕 위를 물감 비슷한 염료로 칠하고 싶어 했다. 나무 열매를 옮기다가 지친 픽시도 있었다. 가니메데는 상대가 픽시라고 해도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고 카론은 별 말 없이 그의 의사를 따라 픽시들을 함께 도와주었다. 그렇게 픽시들과 같이 다니면서 색다른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과거에는 픽시들이 사람들을 픽시들의 마을로 납치해서 수십 년 뒤에 보내준다는 이야기가 아이들을 재우는 자장가의 가사로 널리 쓰였는데, (요즘은 오우거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우연히 그 노래를 들은 픽시는 지금까지도 화가 나 있었다.

"우리들은 인간을 언제나 잘 대접해줘. 인간은 너희처럼 우리를 도와주는걸."

"하지만 펌보그는?"

"펌보그는 다르지."

"그렇지."

들어보니 예전에 못된 픽시 한 명이 노란 꽃을 쓰는 자리(그들은 자신의 마을의 수장에게 노란 꽃을 씌워주는 것 같았다.)에 올라서 극악무도한 만행을 벌이다가 결국 다른 픽시들에 의해 추방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당시의 일을 제때 사과하려고 했는데 인간과 접촉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말을 할 때에는 두세 픽시가 동시에 미안해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니메데는 픽시들의 수명이 보통 어느 정도 되는 건가 궁금해졌다.

카론은 옆에서 나무 열매를 주워담으면서 그들에게 엘프 여왕이 숨겼다는 보물에 대해 물어보았다. 픽시들은 보물, 보물? 하면서 재잘거리다가 비슷한 이야기를 러니웰이 알고 있었다고 말해주었다. 러니웰은 픽시 중에서도 가무를 사랑하는 음유시인으로, 지금은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 밖으로 나가서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가니메데는 챙긴 열매 중에 썩은 열매는 없는지 살피면서 카론에게 물었다.

"그 보물을 반드시 찾고 싶어?"

"찾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래?"

"응. 왜?"

"꽤 열심히 찾는다 싶었거든."

카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네가 그 보물을 찾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 거지."

"어?"

가니메데가 그의 말에 놀라건 말건 카론은 픽시들에게 나무 열매를 전달해주기 위해 마저 걸음을 옮겼다.

쉼없이 밀려 들어오던 부탁도 슬슬 끝이 보였다. 픽시들은 감사를 표하면서 카론과 가니메데에게 선물이 될 만한 것들을 아낌 없이 내주었다. 두 사람은 신선한 과일 열매를 받았고, 카론은 오래 전에 그들이 만난 마법사가 남기고 갔다던 지팡이를 받게 되었다. 주인이 찾으러 오지는 않을까? 가니메데가 걱정하면서 물었지만 지팡이를 자세히 살펴본 카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일은 아마 없을 거야. 그 사람이 인간 수명의 한계를 정복하지 않은 한.

대부분 간단한 일이었지만 계속 움직였더니 두 사람도 지쳤다. 광장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로라가 다시 날아왔다.

"오늘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부탁도 부탁이지만, 다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모양이에요."

그는 일이 힘들지는 않았냐면서 짧게 사과했지만 가니메데도 카론도 그 정도로 고생한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평이하게 대답했다. 기실 바깥에서 받는 의뢰는 목숨을 걸고 검을 휘둘러야 하는 일들이 많았지만 이 안에서 해낸 일들은 소일거리가 대부분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미소짓는 걸 보자 로라도 안심하고 예의 그 '위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크세논에게 어디까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어요. 먼 옛날부터 인간들은 픽시를 사로잡아 온갖 끔찍한 일에 사용하려 들었죠. 저희를 괴롭히는 건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었고요. 그래서 크세논은 저희를 위해, 저희가 자리잡은 숲속의 이공간을 마법으로 숨기고 그 앞에서 긴 잠에 들었답니다. 결계를 걸어준 것도 바로 크세논이죠." 도중에 로라의 표정이 안 좋아졌다. "하지만 이 숲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어요."

"여기가요?"

가니메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은 변함없이 아름다웠다. 로라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이에요. 죽어가는 건, 정확히는 숲이 아니라 저희죠. 픽시들이 힘을 잃어가면 그들이 정착한 숲도 점점 빛을 잃게 마련이랍니다."

"거처를 옮기는 건 어렵습니까?"

"요즘은요. 개척되는 숲이 그동안 많이 늘었죠. 섣불리 있을 곳을 옮겼다가는 상황이 지금보다 더 나빠질 거예요."

가니메데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희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인적이 드물고 외진 곳에 있는 이주하기에 적당한 숲을 찾아달라고 하기 위해서인가요?"

"크세논은 그걸 위해서 여러분을 초대했을 거예요. 하지만…."

로라는 근심 어린 얼굴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죽어가는 건 숲만이 아니에요."

* * *

「돌아왔는가.」

이제는 그들도 이름을 아는 드래곤이 나무 앞에서 그들을 마중했다. 가니메데는 크세논을 올려다보았다.

"픽시들의 사정은 들었어요. 저희는 계속 돌아다닐 생각이었으니까, 픽시들에게 괜찮은 숲을 찾아볼게요."

카론이 가니메데의 말을 받았다.

"요즘은 왕국도 예전만큼 이종족을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왕좌에 앉아있는 인간들의 왕은 특히나 다른 종족들에게 우호적이죠. 그래서 왕성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입니다. 물론 픽시들에게 허락은 구했습니다."

처음에 왕성 이야기가 막 나왔을 때에는 카론도 왕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겠냐면서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칼같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 받은 것도 있고 만나봐야 할 픽시도 있으니 노력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가니메데로 말할 것 같으면, 왕이니 왕성이니 하는 건 너무 먼 얘기였다. 하지만 그곳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기는 했다.

「그렇군. 왕도까지는 갈 수는 없지만 강 너머의 숲까지는 데려다 주겠다.」

"당신은 여기에 계속 남아있을 겁니까?"

「물론이다.」

그렇게 해서 카론과 가니메데는 크세논의 등 위에 올라탔다. 드래곤이 날갯짓을 하자 주변의 나무가 종잇장처럼 가련하게 흔들렸다. 드래곤이 비상하자 그의 발밑으로 보이는 지상이 점점 멀어져갔다.

그들은 드래곤의 등 위에서 그의 날갯죽지에 작은 식물이 몇 포기 자라나있고 그 주변으로 검보라색 얼룩이 진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이것이 바로 픽시들의 고민거리이자 그들에게 남긴 부탁이었다. 드래곤에게 병이 든 건 본성을 거스르고 오래 나는 일 없이 이곳에서 한참을 머문 탓이었다. 픽시들은 크세논을 좋아했고 그만큼 크세논을 걱정했다.

'그 상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나무의 이슬로 치료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부디 그 이슬을 구해줄 수 있겠어요?'

긍지 높은 드래곤은 자신이 지켜주는 픽시들이 그런 부탁을 했다는 걸 알면 노할 게 뻔했다. 그래서 그들은 픽시들의 마을에서 받은 부탁을 두 사람만 알고 있는 비밀로 두었다. 가니메데는 창공에서 바람을 맞으면서 카론이 들려주었던 옛날 역사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종족을 인간의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철을 든 이십 년동안의 전쟁이 종막을 맞이한 것도 불과 백년 전의 일이었다. 지금 왕은 당시에 전쟁과는 연관이 없었던 몇몇 종족들과 협약을 맺고 그들과 교류하고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힘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과거 전쟁의 처참한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있었다.

가니메데는 노란 꽃의 픽시가 적어준 편지가 품 안에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고는 옷자락을 잘 여몄다.

"잘 되면 좋겠다. 우리가 왕성에 들어갈 수 있을까?"

"우선 가봐야지."

그렇게 등 위에 인간 둘을 태운 회색 비늘의 드래곤은 맹렬하게 날아 드넓은 대지를 가로질렀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인간들이 보다 수월하게 앞으로의 여정을 나아갈 수 있도록, 헬란 마을 근처의 숲에 그들을 내려줄 때 마법을 풀었다. 그러자 눈이 좋은 몇몇 사람들은 용을 타고 내려온 사람들을 목격했고, 카론과 가니메데는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융숭한 대접을 받으면서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답해주어야 했다. 카론의 주도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걸 밝히지는 않았지만, 덕분에 몹시 비밀스럽고도 중요한 임무를 지니고 왕도로 향하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낭만적인 사명감에 젖어 그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왕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이제 두 사람은 왕국의 중심, 왕이 사는 성을 향한 길을 떠나야 했다. 작은 마을을 떠나면서는 상상도 못했던 목적지였지만 어쩐지 그곳에 도착하는 게 여행의 끝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침이 밝고 여관방에서 짐을 챙긴 카론이 가니메데를 보면서 말했다.

"가자."

"응!"

가니메데는 집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 오랜 여정을 분명 좋아하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가 여관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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