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양상추를 품에 안은 가니메데가 가슴팍을 손바닥으로 두어번 털었다. 휘장에 묻은 축축한 흙이 투박한 손길에 뭉그러진다. 위크먼 사관학교의 휘장. 위크먼 사관학교는 본래 육군 양성 의도로 만들어진 시설이었다. 하지만, 대륙을 둘러싼 전쟁이 모두 종식된 지금은 내부의 군사를 양성하는 개념보다 마을의 보안을 담당하는 기사단을 육성하는 시설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국가 업무를 수행할 인재 양성 교육을 시행하기도 했다. 즉, 사관학교라는 명칭은 낡고 애매한 이름이지만 적당한 새 이름표를 찾지 못해 굳어진 채로 계속 사용되고 있는 셈이다. 입학하는 학생들의 나이는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의 나이로 다양했는데, 그만큼 입학 사유도 제각각이었다. 생계를 잇기 위한 목적이 주였지만 각자 나름의 사정을 품에 안고 배움을 지속하는 공간. 위크먼 사관학교는 모든 학생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포용하는 시설이었다.

 

"어쩐지 시아라가 점심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달려가더라니."

 

그 중 가니메데는 한 살 터울의 동생과 동시 입학한 다소 특이한 경우였다. 눈에 띄는 화려한 금발을 가진 둘은 교내에서 곧잘 '테일러 남매'로 묶여 불렸다.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는 가니메데와 교내 창술 경합 대회에서 언제나 1등을 거머쥐는 시아라. 단순히 한 또래 그룹에서 유행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전교생이 둘을 그렇게 여겼다. 가니메데가 양상추를 수확해서 들고 있는 것도 사실 이 때문이다. 대부분이 냄새나는 거름을 가져와 기숙사 뒤 텃밭에 뿌리고 작물을 돌보길 번거로워했다. 그러나 어떤 교사도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가니메데는 묵묵히 모든 야채를 관리했다. 사관학교의 학생이라면 꽤 자주 목격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카론은 그 광경을 보고 한숨을 쉬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너는……."

"여기, 제 오빠도 봐줘요!"

 

카론이 손수건으로 가니메데의 휘장을 문질러 닦으며 운을 뗀 그때였다. 시아라가 우악스럽게 점술가의 손을 이끌고 둘의 앞으로 전진해왔다. 노란 눈을 반짝이는 천진난만한 모습에 가니메데는 머쓱하게 웃었다. 곤란해하시잖아. 동생을 타이르는데 도가 튼 말투였다. 시아라가 새침하게 손을 떼면, 투박하게 막 빚어낸 점토 인형처럼 점술가가 둘 앞에 섰다. 그는 가니메데를 바라봤다. 복장 탓에 실제로 바라봤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었지만, 돌아간 머리는 명백히 가니메데를 향해 있었다. 애초에 운명의 상대라는 거, 이렇게 옥수수 낱알 튀기듯 해낼 수 있는 일이던가? 가니메데가 때아닌 의문에 빠져있노라면 점술가는 영 딴판인 대답을 내놓는다.

 

"당신은 이미 죽은 것과 같아요."

"네?"

"짙은 암흑의 냄새가 가까이에서 납니다. 생명의 빛은 미약하고, 당신은 죽음의 구덩이로 낙하하게 될 겁니다."

"어머, 어떡해!"

 

잔뜩 울상이 되어 말을 꺼낸 건 시아라였다. 우리 다음 주에 옆 마을로 괴수 정벌에 나가기로 했잖아. 오빠, 이제 죽어? 그래도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줄게. 팔에 덜렁 매달리긴 덤이었다. 가니메데는 달라붙은 동생에게 건성으로 대답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가 밝은 미소를 최대한 쥐어짜면 카론의 얼굴은 대조적으로 굳어갔다. 카론은 제아무리 직업이라 해도 면전에 악담을 퍼붓는 모양새가 예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가니메데는 별생각이 없었다. 시아라는 호들갑을 뚝 멈추고 기민하게 카론의 표정을 살폈다. 뒤늦은 수습을 하기 위해 작은 머리를 굴려 12가지 대책을 생각하고 있으면, 가니메데가 침묵을 가르고 불쑥 입을 열었다.

 

"저……."

"네."

"감사합니다. 양상추라도 드실래요?"

 

 

 

2.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네 반의 선생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창고에 처박아둔 샹들리에에 불을 올렸다. 학생들의 한껏 고조된 웃음소리가 높은 홀 천장에 닿고, 공기 중에 상기된 떨림이 가득하다. 모두가 편안한 미소를 지은 채 마음껏 떠들며 저녁 만찬을 즐기는 연에 몇 번 없는 풍경이다. 만찬 테이블 가운데에는 괴수 정벌에 감사하며 주민들이 건네준 돼지고기가 통째로 치장 되어있었다. 부상자 없는 전원 생환. 유례없는 성과에 오늘만은 모두가 고된 수업과 훈련의 노고를 잊고 어깨에 힘이 빠진 채다.

 

"이걸 왜 네가 하고 있어?"

"잔이 비어있잖아." 주전자를 기울여 빈 물잔을 채우던 가니메데가 돌아보지도 않고 목소리에 대답했다.

"그걸 물은 게 아니거든." 카론은 위화감을 느꼈다.

 

가니메데는 꼬박 다섯 잔의 물을 다 채우고 나서야 주전자를 놓고 상대가 건네는 유리잔을 받았다. 달콤하고 산뜻한 냄새는 복숭아향 같았고, 옅은 분홍빛 액체는 손목을 기울이는 대로 기포가 터지며 물결쳤다.

 

"팔 빠지는 줄 알았어."

"모처럼 좋은 날이니까. 다들 자질구레한 일은 신경 끄고 마음 놓고 즐기는 쪽이 좋지."

"나 참."

 

이쪽에서 잔을 불쑥 내밀면 카론이 가볍게 건배에 응한다. 따져 물을 말은 많았다. '다들'에 왜 자기 자신은 포함하지 않는지, 모두가 긴장한 채로 진행한 전투니 너도 똑같이 피로할 거라는 둥. 하지만 '다음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고 일축하고 가볍게 잔을 부딪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공연히 미소 짓는 상대의 얼굴을 보니 의미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니메데가 자연스럽게, 카론에게는 서투르게 주제를 돌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새삼 입학식 때가 생각나는데."

"여기서 만찬을 즐기긴 했지."

"맞아. 그때도 이렇게 잔뜩 늘어놓고 먹었잖아."

 

카론과 가니메데는 재작년 입학 동기로 적성이 달라 다른 반에 배정되었다. 가니메데는 유년기부터 동생이 열이나 있는 집안에서 자라 어린 나이임에도 잔뼈가 굵고 집안일에 도가 텄다. 하지만 연이은 흉년에 동생들이 배를 곯자 나랏돈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위크먼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작은 시골 마을 출신이지만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검술이라면 자신 있었고, 기숙사로 입적하면 겸사겸사 입도 줄일 수 있었다. 가니메데와 언제나 함께 가족을 생각해 주는 동생이 함께 입학한 이유도 그 탓이다.

 

반면 카론은 몰락한 귀족에 가까웠다. 카론의 아버지, 일라이 유스티티아 공작이 사특한 흑마법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일파만파 퍼졌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누구보다 영지만을 위하는 자비로운 사람이었으나 실상은 구휼원의 아이들을 빼돌려 입맛대로 실험에 써먹는 사탄이었으니, 유스티티아 공작가가 일순 몰락함은 물론이고 남아있는 아내와 아이에게도 비난의 화살이 향했다. 유스티티아 공작가의 영식은 아버지의 충격적인 이면을 알게 된 이후로 '카론 유스티티아'에서 '카론 유스티오'로 이름을 바꾸고 돌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영지가 드넓고 부유한 땅이었던 탓에 '살인마 일라이 유스티티아' 사건은 꽤 오랫동안 이 대륙을 달궜다. 대부분의 입학생이 그가 불미스러운 집안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뒤에서 수군대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다. 카론은 그런 시선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상냥하게 말을 걸면 눈앞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섞이기 힘든 배경임에도 친밀한 관계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이것저것 많았지만, 같은 방을 사용하는 룸메이트 관계란 사실이 가장 큰 이유에 해당했다. 학교 측에서는 실전 전투의 단결력을 올리고 교류의 폭을 넓힌다는 이유로 각기 다른 반 학생 둘을 붙여 기숙사를 배정했다. 검술 적성반인 가니메데와 마법 적성반인 카론이 모범적인 예시였는데, 반이 다르다 보니 낮에는 각자의 훈련에 열중하고 식사를 마친 뒤 밤이 되어야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아침 인사, 그리고 저녁 인사. 마냥 그렇게도 지낼 수 있는 사이지만 둘은 다른 룸메이트보다 더 가까웠다. 입학식으로부터 한 달이나 지나서 있었던 사건이 둘을 각별하게 만들어줬기 때문이다.

 

훈련을 모두 마친 늦은 밤, 카론은 방에서 홀로 등불에 의지해 책을 읽고 있었다. 정규 일정이 전부 끝난 시간이지만 여가 시간을 쪼개 몸을 갈고 닦는 것에 몰두하는 학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카론도 가니메데의 부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꼬질꼬질한 행색으로 생활복을 둘둘 말아 품에 안고 들어오기 전까지는.

 

"왔어?"

"카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할 게 있어."

 

아직 차가운 밤공기를 훅 몰고 방의 정중앙으로 들어온 가니메데가 옷으로 만든 요람을 바닥에 내려놨다. 동시에 카론은 책을 내려놓고 등불을 들었다. 불을 들어 옷 더미 가운데에 담긴 주인공을 비추면, 다름 아닌 새끼 고양이였다. 카론이 새로 생긴 룸메이트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서 가니메데를 바라봤다.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발이 저렸는지, 그가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식사 시간에 식당으로 가고 있는데, 요리사분께서 재료 나르기를 좀 도와달라고 하시더라고. 차마 거절할 수 없어서 식당으로 가는 김에 같이 한참 옮겨주고 뒤늦게 차려주시는 특식으로 식사했지. 그러고 나니 식당 입구에서 같은 반 동기가 지갑을 잃어버렸길래 같이 찾아줬어. 분실물을 찾아주고 나오니 한참 캄캄한 밤이더라고. 기숙사로 들어오려는데 한슨 사감 선생님이 실습용 그물 좀 제자리에 놔달라 부탁했어. 그래서 그걸 들고 호수 뒤 창고 근처로 갔는데, 근처에서 날갯짓 소리가 들려서 보니까 글쎄……

 

"잠깐."

"어?"

"그걸 다 거절 안 하고 들어줬단 말이야?"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카론이 말을 잘랐다.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는 사이, 어느새 옅게 낑낑대던 소리가 멎었다. 까마귀에게 심히 쪼인 고양이는 치료된 지 오래였다. 몸이 커졌다가 줄어들며 잠든 모습이 털이 난 작은 풍선 같았다. 카론이 털 풍선을 내려다보다 말을 이었다. "내 소문은 들었어?" 약간의 한숨이 섞인 말이었고, "물론이지." 그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네가 엄청 유능한 마법사라고 하더라."

"음?"

"그리고 너라면 거절하지 않고 들어줄 것 같아서."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평가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다 좋아하는 걸까. 오늘 하루만 해도 그가 도운 사람이 이 학교에 몇이나 될까. 친절은 신뢰 혹은 애정에서 비롯된 행위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타인을 위할 순 없을 테다. 카론이 잠깐 웃었다. 그러고 나서야 "내가 잘한다고 소문난 건 치유 마법이 아닌데." 하고 덧붙였다. 가니메데도 처음 보는 표정을 보고 따라 웃었다. 하지만 상의도 않고 룸메이트를 늘리는 건 곤란해. 그렇게 말하며 카론은 서랍에서 바구니를 꺼냈었다.

 

"그랬지, 아마."

"네가 날 그렇게 다급하게 부른 건 처음이었어."

 

고양이에게는 로라라는 이름을 지어줬다던가, 지금은 사관학교의 멋진 고양이가 되어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사랑을 잔뜩 받고 있다던가, 그런 자질구레한 추억은 무르익은 분위기에 꺼내기 딱 좋게 익어있었다. 가니메데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회상에 잠겼다. 내리쬐는 조명의 색 때문인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니, 다시 보니 취한 게 분명했다. 뒤늦게 카론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너, 취했구나."

"어? 하하."

"무슨 일로 과음을 다 하고."

"아무도 안 다친 게 기뻐서."

 

웃고 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웃는 가니메데는 근심과 걱정을 모조리 잊은 얼굴이다. 잔을 내려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고장 난 축음기처럼 이전의 이야기를 반복하다가 다시 물을 마시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있다보면 홀에서 웃고 떠들며 춤을 추던 분위기는 얼추 소강상태가 되고, 말소리보다 식기를 정리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가니메데가 간신히 걸터앉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혀는 꼬인 것 없이 뻔뻔했지만 느릿느릿한 게 영락없는 취객이었다. 내일이 안식일이기에 망정이지 아니라면 숙취를 끌어안고 내일 훈련에 임해야 할 위기였다.

 

"미안. 처음은 아니고,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냄새나." 카론이 손부채질을 했다.

"방으로 좀 데려가 줄래? 시아라를 부르기엔 면목이 없어서."

"나는 괜찮다는 거야?"

"음, 아마도."

 

하지만 가끔 이런 여유도 필요한 법이다. 정작 '자질구레한 일'은 카론이 다 떠맡은 꼴이 됐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카론은 괘씸한 주정뱅이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줬다. 몸에 실린 무게가 평소랑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능숙하게 상대의 팔 한쪽을 잡아당겨 목에 건채 기숙사로 향했다. 걸음이 느려 이 속도라면 침대에 누워 아침 해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니메데가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 꺼내려 했지만 헛손질이었고, 카론이 태연하게 반대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방 열쇠를 꺼냈다.

 

"다른 게 아니라 너라면 믿고 등을 맡겨도 괜찮겠다는 소리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이지."

"시아라에게 말하면 안 돼."

 

절대로 말하지 마. 들키면 안 돼. 방으로 가는 동안 가니메데의 당부는 세 번이나 반복됐다.

 

 

 

3.

이변. 불가해한 현상. 날개가 달리고 다리를 여럿 갖췄으며 날카로운 꼬리를 지닌 온갖 괴물이 어느 날 땅에 생긴 틈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괴수들은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을 입에 넣길 거리끼지 않으며, 삶의 터전과 밭을 폐허로 만든다. 순식간에 괴수들은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괴수는 그 검고 깊은 틈에서 태어난다는 게 정론이다. 이 사태를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해당 틈을 '특이점'이라 부르기 시작한 건 20년 전 부터다.

 

이번 임무는 새롭게 관측된 특이점에서 나오는 괴수를 전부 토벌하는 일이었다. 규모가 규모이니만큼 네 반이 모두 참여하는 합동 임무였는데, 마차에 탑승한 채로 열흘을 이동해야 하는 고된 여정이기도 했다. 온갖 무기와 장비, 식량을 한데 모아 담으면 남은 공간에 나란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임무에 대한 긴장감과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고양감이 뒤섞여 다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도 한 시간 남짓에 불과했다. 이후로는 대부분 눈을 감고 잠을 청하거나, 옆자리 학생과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같은 조네."

"너희 반은 특히 후위가 중요하니까."

 

가니메데와 카론은 후자에 속했다. 그새 검술반의 반장이 된 가니메데는 언제나 최전선을 도맡게 됐는데, 뒤를 맡아주고 회복을 도맡는 건 마법반의 일이었다. 가니메데는 유독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다른 학생들에게는 든든한 전위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때문에 카론의 잔소리를 부르기도 했다. 이번 전투에 앞서 한 소리 나올만한 분위기가 되자, 가니메데가 재빠르게 "너한테 주려고 챙긴 게 있어." 하고 말을 돌렸다. 이번에는 단번에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내가 직접 만들었어."

 

노란 끈과 갈색 끈을 엮어 만든 기다란 가죽끈이었다. 손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촘촘하고 단단했는데, 테일러 집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대로 만드는 법을 물려주는 끈이라 덧붙였다. 선물 받을 상대를 생각하면서 만드는 거야. 주머니를 매다는 데에도 쓰고 의상 장식으로 사용할 수도 있어. 아버지는 항상 사람 사이의 연을 중요하게 여기라 하셨거든. 그걸 눈으로 보이게끔 만든 게 이 매듭 묶기 방식이야. 처음으로 만들게 되면 꼭 너에게 주고 싶었어.

 

"넌 남이랑 엮이는 걸 영 싫어하는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아."

"그래?"

 

그새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가니메데가 생각했다. 카론은 그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꿈에도 모르고 선물을 받았다. "고마워."하고 말했다. 하지만 조심해. 실전은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니까. 그냥 넘어가지 않고 카론이 덧붙이면 가니메데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우선은 자둘까."

"야."

"……."

"…해 뜨면 깨울게."

 

머리가 툭 기운다. 금빛 머리칼이 카론의 뺨을 간지럽히면, 어쩐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카론은 손 위의 선물을 들여다보며 여명이 비칠 때까지 고민했다. 어떻게 사용해야 좋을까.

4.

박쥐 날개, 독수리 발톱, 돼지머리. 연관 없는 요소들을 한데 모아 빚어낸 괴수들은 아무리 치워도 끝을 모르고 특이점을 비집고 나왔다. 짧으면 반나절부터 길어도 이틀이면 제압되는 것이 균열의 특징이었는데, 이번 균열은 어째서인지 사흘째 범람이 끊이질 않았다. 기계적으로 진형을 갖추고 짐승의 머리를, 목을, 다리를 베어내던 학생들이 문득 고개를 들게 된 건 나흘하고도 반나절이 지나던 무렵이었다.

 

잘게 떨리던 땅이 점점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누구든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심장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딛고 선 땅이 울렁거려, 작은 병에 갇혀 마구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쿠궁, 쿵. 땅이 흔들리고 산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리. 명백히 개전을 알리는 나팔 소리라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시발점은 역시 특이점이었는데, 구덩이 안쪽에서 유례 없는 거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커지고 있어! 지면의 경계면이 확장된다! 우렁찬 교관의 외침이 상황을 정의한다. 땅이 무너져 늘어나는 빈 곳만큼 엄청난 속도로 공기를 빨아들여 머리카락이 마구 휘날렸다. 지도교사가 재빠르게 후퇴를 명령하면, 학생들이 우왕좌왕하며 몸을 물렸다. 그러나 몇몇은 못 박힌 말뚝처럼 우뚝 설 수 밖에 없었는데, 광활한 검은 공간을 찢고 나오는 존재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드래곤이다."

 

넋을 잃은 채로 누군가 중얼거렸다. 환상의 생물. 오래 전에만 있었던 설화와 같은 존재. 우레와 같은 울음소리가 공기를 진동시키면, 바닥에도 벼락이 전진하듯 수많은 균열이 생겨났다. 드래곤이 쥐어짜 내듯 머리를 특이점 바깥으로 내밀고 기다란 목을 휘두르면 주변이 매쉬드 포테이토처럼 몽땅 뭉개졌다. 반쯤 내민 몸은 은 장신구로 수놓은 듯한 수려한 외피를 가졌는데, 누구라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아름다운 비늘의 배열이었다. 내로라하는 장인이 만든 갑옷보다도 단단한 방어구. 하늘에 얼마 남지 않은 빛이 조각조각 겉껍질에 닿았다가 흩어졌다. 전열을 가다듬은 후방 인원이 화살을 쏘아 올리고 마법을 발사했으나 강렬한 돌풍 탓에 드래곤에게 도달하지 못한 채로 전부 부스러졌다.

 

"이쪽으로, 빨리!" 최전선에서 가니메데가 목이 터져라 외쳤다.

"가니메데!"

"어서 뒤로 가!"

 

가니메데는 넋 놓은 학생들을 챙기느라 한참 분주하다. 학교는 학생에게 어떤 경우든 목숨을 최우선으로 챙기도록 당부했다. 당황하지 않고 뒤처진 동료들의 등을 밀어 후퇴하게끔 하는 일은 자연스레 반장의 최우선 역할이 되었다. 역설적으로, 카론은 그 침착한 얼굴에서 최후를 읽었다. 모든 것을 각오한 얼굴.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떠올랐다. 동료에게 등을 맡기고 맨 앞에 서는 사람은 항상 죽음을 각오해야 해. 유사시에는 죽어도 괜찮아. 그게 사상자를 최대한 줄이는 일이라면. 그럴 때마다 바보 같은 소리 말라며 이어지는 말을 차단했지만, 가니메데는 '만약'에 대비한 것이라며 웃어넘기곤 했다. 드래곤의 등장은 이례적인 일이다. 카론은 가니메데를 안다. 게다가 한결 같은 사람이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최종적으로 불안이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몸을 돌려 그 고집불통에게 달려갔지만, 부스러진 땅이 꺼지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5.

오랜 시간 특이점에 대한 연구는 계속됐지만, 시작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명료한 진실이 하나 존재한다. 얼음산에서 봇짐 하나 없이 돌아온 탐험가, 왕성의 이름난 전투 마법사, 수많은 특이점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전부 지켜본 학자까지. 특이점에 휘말린 사람은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특이점은 모든 생명의 끝. 암흑으로 뛰어드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네 살배기 어린 애도 아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발아래에 암흑, 위로는 드래곤의 머리를 둔 가니메데에게 주어진 생명줄은 카론의 팔 뿐. 양쪽 다 흙먼지를 뒤집어써 꼴이 말이 아니었다. 다만 가니메데는 중심을 잃으며 검을 놓쳤기에, 절벽에서 고작 나뭇가지 하나에 매달린 모양새가 되었다. 특이점은 주변의 중력을 왜곡시킨다. 아공간이 잡아당기는 힘과 상대의 무게를 합한 만큼의 육중한 무게추가 카론의 어깨에 걸렸다. 가니메데를 꽉 움켜쥔 왼손에 하얀 뼈가 도드라진다. 차마 그 팔을 마주 잡지 못하는 손이 애매하게 허공에 펼쳐져 있다.

 

"카론, 이러면 너까지 위험해져."

"……."

"마지막으로 부탁할게."

"……."

"손을 놔줘."

 

예상한 일이다. '만약'이 오면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목숨을 버린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쪽은 그렇게 둘 생각이 조금도 없다.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하고많은 사람 중 가니메데가 죽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언제나 타인을 위하는, 상냥한 인물. 모두에게 더욱 필요한 사람. 한껏 고개를 치켜든 드래곤이 주변의 마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이를 꽉 물어 비틀린 음성이 들려온다.

 

"거절할게."

 

카론은 지팡이에 달린 매듭끈을 잡아당겨 재차 고쳐잡았다. 하늘을 겨누듯 오른손을 치켜들면, 끝에서 빛이 터진다. 그 뒤로는 역설적인 암전. 진창에 처박혀도 아무도 모를 어둠이었다.

 

 

 

6.

가니메데가 눈을 뜨면 하얀 천장이다. 낯설지는 않고 조금 익숙했는데, 기숙사의 의료 시설이 딱 이런 모양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쉬며 침상에서 상체를 일으키면, 무릎에 느껴지는 격통에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부러진 걸 접붙여서 그래. 하루 더 쉬면 깨끗이 나아." 카론이 주전자를 내려놓고 말했다. 이어서 상대의 턱을 잡고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팔과 팔꿈치를 잡아 접었다 펴는 것을 몇 번 반복해 보고 나서야 옆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얼굴의 상처는 전부 치료됐네."

"어떻게 된 거야?"

"반동으로 날아가면서 머리를 부딪히고 이틀을 기절했어."

"그,것도 궁금하긴 했지만. 그걸 물은 게 아니거든." 가니메데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 말을 들은 카론이 검지로 상대를 가리켰다. 곧 가니메데의 툭 튀어나온 울대뼈 위를 가볍게 찔렀다. 역린. 드래곤의 턱 밑 급소 부위. 거꾸로 박혀 들어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비늘. 치명적인 약점. 그 좁은 구역은 물리적으로도 마법적으로도 취약해 일격을 가하면 아무리 거대한 드래곤이라도 크게 고통스러워한다. 사관학교의 생물학 교과서에도 적혀있지 않은 이야기를 카론은 고저 없이 읊어줬다. "너, 혹시 드래곤이야?" "그럴 리가." 카론이 잠깐 황당한 얼굴로 가니메데를 쳐다봤다. 드문 표정이었다.

 

"가끔 드래곤이 사람으로 변해서 마을로 내려오는 일도 있다길래."

"아. 그 소리야?"

"하긴, 넌 역린 같은 약점도 없겠지." 가니메데가 물잔을 쥐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거라면 있을지도." 카론이 익숙하게 건넸다.

 

그러고서 오늘의 메뉴를 읊듯 평이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실은 유스티티아 가의 피에는 유전되는 성질이 있어. 하나같이 흑마법에 능하다는 거야. 고조할아버지 때부터 암암리에 숨겨왔던 사실이지만, 내 아버지 됐던 사람은 본성을 억누르지 못한 거지. '그런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지루하고 징그러운 일이야. 피를 몸에서 전부 뽑아낸다고 한들 바꿀 수 없는 성질이고, 무슨 일을 해도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에 있는 느낌이지. 그래, 정확히 그런 기분이야. 나도 언제든지 그 재능을 살려 살인을 저지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카론은 상대가 물을 마시다 사레가 들려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마쳤다.

 

"그게 절대 보여주기 싫은 내 약점이야. 남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네."

"……크흠."

 

가니메데는 물을 마저 마시고 목을 가다듬었다. 무어라 쉽게 답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여태까지 잘 해왔다고 칭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간 지켜봐 온 그의 모습은 고독하게 비칠 수 있으나 외롭진 않았기 때문이다. 혼자 살아가는 걸로 모든 것이 충분한 사람. 카론은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길 택했다. "그걸 고민하는 시점에서부터 너는 좋은 사람이야." 하고, 웃었다.

 

"당연하지. 항상 노력하고 있어." 불퉁한 말투는 아니었다. 다만 카론은 쓸데없이 조금 긴 이야기였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그렇게 말해도 내가 마지막에 본 건 빛이었으니까."

"기절한 주제에 말은 잘하네."

"못마땅한 얼굴이었지만 충분히 다른 사람들을 돕고 있잖아, 너도."

 

이번만큼은 카론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말을 꺼내기 애매했다. 그 순간만큼은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가니메데는 연신 해맑게 웃는 얼굴이다. 웃음이 잦아들면, 송골송골 물이 맺힌 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사람을 돕는 이유는 딱히 없어. 난 고향에서 검술 천재라며 엄청나게 기대받고 자랐거든. 동생은 열이나 있는 데다가, 마을 사람들은 내가 엄청난 사람이 될 거라고 추켜세워주니까. 조그만 마을이어도 축제 때면 성대한 음식을 잔뜩 받았고 흉년이 들어 매 끼니 때우기 힘들어졌을 때도 수많은 도움을 받았어. 그만큼 뭔가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받은 기대와 관심과 친절을 돌려주고 싶었어. 그리고 정말 '괜찮은 사람'이 되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정말 그것뿐이야. 난 그렇게 상냥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호수에 비친 상을 들여다보듯, 카론과 자신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가니메데 또한 시아라에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카론은 놀라지도 실망하지도 않은 애매한 표정이었다. 네가 사람을 아주 좋아하는 줄 알았어, 하고 답할 뿐이었다. 가니메데는 후한 평가가 고마운 동시에 자신이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치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침묵은 잠시, 이내 가니메데가 자세를 고치며 말했다.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

 

 

 

7.

특이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암흑이 범람하고 마수가 창궐하는 시대에 인간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정성껏 키운 농작물이 하루아침에 전부 쑥대밭이 되기도 하고, 밝혀진 적 없는 새로운 괴수들을 생포해 길들이려 노력하기도 한다. 어떤 지역은 특이점으로 푹 꺼진 땅에 몸을 녹이기 좋은 뜨거운 지하수가 차올라 여행 명소가 되기도 했다. 연구는 몇 년째 아무런 차도가 없어 보였으나 연구자들은 기어이 특이점 발생 지역 간의 규칙을 파악했다. 이는 엄청난 도약이었는데, 다음 발생 구역과 규모를 미리 파악하고 방비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람들은 불안정한 일상에 적응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특이점을 정벌하는 기사를 굉장히 명예롭게 여기게 됐다. 게다가 수많은 아이가 기사의 꿈을 꾼다. 어떤 출신, 어떤 계급이든 간에.

 

수많은 기사가 괴물들을 무찌르며 이름을 날렸지만, 그중 검 한 자루의 단신으로 드래곤에게 뛰어든 용사가 있었다. 선명한 금빛 머리를 가진 남자. 그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외진 마을이라도 순회하며 주민들을 도왔다. 가장 능숙했던 건 역시나 특이점에서 나온 마수들을 무찌르는 일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농업이나 기계 다루기에도 능해 토양과 기후에 맞는 씨앗을 전해주고 마을을 떠났다는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 그가 전해준 씨앗으로 틔운 작물에 이름을 붙인 지방도 존재한다. 사람들은 사소한 일상에 스며든 흔적을 보며 매 끼니 영웅담으로 남은 그를 생각한다.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을 텐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친절이란 이토록 오랫동안 남는다. 신기한 일이지.

 

그리하여 도움 받은 주민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그를 이렇게 불렀다.

 

황금의 계보, 가니메데.

용사라고 불리는 그의 곁에는 한 명의 마법사가 늘 함께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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