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리사는 단순하게 높은 곳을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방향을 찾는답시고 나무 위로 올라간 벨리사를 보며 리온은 불현듯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나무를 잘 탔나……. 과거를 차근히 되짚어보니 지금의 깨달음은 충분히 알고 있던 사실을 되새김질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으으으음~!” 나무 위의 벨리사는 얼굴 위로 손차양을 드리운 채로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때.” 내려오라거나 위험하다는 말을 건네는 대신 리온은 질문했다. 벨리사는 곧장 대답하는 대신 나뭇가지에 매달려 휘적휘적 몸을 흔들더니, 도움닫기도 없이 훌쩍 뛰어 아래로 내려왔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날랜 몸놀림이었으나 그런 모습을 매번 봐온 리온의 표정은 미동도 없이 평온했다. 더 나아가 심드렁해 보이기까지 했다. 읏차. 착지하며 바닥을 짚느라 흙이 묻은 손을 탁탁 털며 벨리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쪽 맞다고 했지~? 후훙, 저쪽에 마을 보이더라.”

그 자신만만한 태도를 리온이 농조로 되받았다.

“지도 간수를 잘했으면 진작 도착했겠지만….”

두 사람은 벌써 이레째 산을 넘고 있었다.

최초에 산으로 접어든 이유는 이 산맥의 건너편으로 편지를 운송해 달란 부탁을 받아서였다. 산 너머로 시집간 딸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안부 편지였다. 파발꾼을 써도 좋을 일을 이들에게 부탁한 것은 이곳의 산세가 워낙 험해 지나는 여행객도, 물건을 팔러 오는 캐러밴도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신원을 보장할 수 없는 모험가에게 이런 편지를 맡기는 행위가 과연 가당키나 한가…싶어도, 벨리사의 존재는 언제나 그러한 의문을 손쉽게 해소했다. 그는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신뢰를 사고, 식사 한 번에 누구와도 허물없는 친구가 되는 기이한 친화력의 소유자였다. 이 부탁도 하룻밤 머물게 된 집(이 역시 벨리사가 수배한 것으로 여관조차도 아니었다)에 농작물을 전하러 온 이웃 주민과 삶은 달걀을 나누어 먹다 받아온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벨리사는 타인의 곤란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인물이었고 리온은 그에 대해 반박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부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두 사람이 마을을 떠나기 전 편지와 함께 약간의 식량과 지도를 건네주었다. 이 산은 경사가 가파른데다 드나드는 사람도 많지 않아 길이 옳게 나 있지 않으니 지도가 필요할 것이라면서. 그건 제대로 된 지도라기보단 기억에 의존해 얼기설기 그려낸 약도처럼 보였다. 아마 부탁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일이었으리라. 만만찮은 산처럼 보였는데, 잘됐네요! 벨리사는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그들의 배웅을 받았다.

“어, 없다.” 그리고 그날 밤, 벨리사는 지도를 잃어버렸다. “편지는?” 천만다행으로 편지는 온전히 있었다. 야영을 위해 짐을 풀던 찰나에 놓쳐버린 것일까? 작은 종이였으니 바람에 날아갔을 수도, 새나 다람쥐 같은 작은 산짐승이 물고 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벨리사는 생각지도 못한 실수에 크게 상심하며 자책했으나 시무룩하게 하룻밤을 보내고선 부러 더 씩씩하게 앞서나가며 길을 찾았다. 그 결과 나흘이면 넘을 수 있을 거라 들은 산을 이레 동안이나 헤매버리고 말았지만.

“우, 그건 미안하다니까아.”

과장되게 절절매는 투였다. 리온에게도 벨리사를 탓하려는 의도는 없었으니, 그의 장난스러운 타박에 벨리사가 장단을 맞춰준 셈이었다. 애초에 방향을 확인하는 정도라면 리온의 비행 마법도 있었고―그러니까 벨리사가 손수 나무를 탈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외에도 리온은 길을 찾는 데 쓸만한 마법이나 지식을 십수 가지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벨리사에게 모든 걸 맡기는 이유는 그들의 여행이 서두를 까닭이 전혀 없는 여정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가자. 오늘은 침대에서 잘 수 있겠네.”

“응!”

왕국력 224년.

작은 마을에 소란이 일었다. 낯선 자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한다 싶더니 빵집 근처에 오래 비어있던 집이 수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왕국 벽지의 자그마한 영지는 워낙 굴곡 없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는지라 이 일은 주민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누군가 큰 죄를 저질러 유배를 오는 것이라든지, 돈 많은 자산가가 요양을 위해 별장을 꾸리는 것이라든지 근거 없는 소문이 부풀어졌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 날, 투박하지만 견고한 마차를 타고 마을에 도착한 노부부는 저들의 이름을 클라인이라 소개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성에서 그 무엇도 유추하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좌천된 귀족이나 요양해야 하는 병자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가구나 장식품 따위를 만드는 목공소를 차리고자 했고, 이름이 없던 집은 곧 클라인 공방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만, 마을에 당도한 것은 노부부만이 아니었는데… 벨리사의 부모님은 그날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글쎄, 인형처럼 작고 예쁜 애가 품에 더 작은 애를 안고 있더라니까.

그 작은 애의 이름은 시온, 더 작은 애의 이름은 리온이었다.

여덟 살이었던 시온은 그즈음의 일을 똑똑히 기억했다. 보기 드문 마차를 구경하러 온 또래 아이들이나, 새로운 이웃을 환영하기 위해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같은 것을. 반면 그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리온은 그때의 일이나 이 마을에 오기 전의 생활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그래!”

“넌 여기서 태어났잖아.”

이 마을 토박이면서,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는 투로 리온이 말했다. 대꾸하면서도 눈은 계속 무릎에 얹은 책을 보는 채였다. 벨리사는 리온이 저를 보든 말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아~ 시온 언니랑 리온이 처음부터 우리 마을에 있었던 것 같다구. 케이 언니도 그렇대!” “그래? 뭐…. 워낙 어릴 때니까.” 클라인 공방 근처의 빵집에는 연년생 자매가 살았다. 그중 동생인 벨리사는 리온과 동년배였으므로 자매가 그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벨리사의 말에 수긍한 리온은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최초의 기억이라고 하잖아. 엄청엄청 어릴 때.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기억하는 거.”

“응.”

리온의 덤덤한 대답에도 벨리사는 그의 곁을 지키며 조잘조잘 입을 놀렸다. 초여름, 무성하게 자라난 들판의 잔디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벨리사는 옷에 풀물이 들건 말건 이제 숫제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책을 읽는 와중에 벨리사가 하염없이 재잘거리는 것도, 대화 중에 리온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도 서로에게는 익숙한 일이라 상대의 행동에 지적은 없었다. “나는 그게 식탁이거든. 우리 집 빵 냄새가 나고, 따뜻하고. 다같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데… 리온 네도 있었어. 할아버지랑 할머니랑~ 시온 언니랑 너까지.” “그건 신기하네….” “리온은 어때?” “나? 나는….” 벨리사만큼은 아니더라도 리온의 기억 역시 비슷했다. 벨리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의 곁에 존재했다. 조부모에겐 친손녀처럼 어리광을 부리고, 시온을 자매처럼 따르며 제게도 손을 뻗어주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아! 대답을 듣기도 전에 벨리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 행동에는 리온도 책에서 눈을 떼고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오실 때 됐다.”

가자, 리온. 기억 속의 모습처럼 벨리사가 리온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 손을 잡았다. 풀잎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 사이로 벨리사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클라인 부부로 말할 것 같으면 두 손자의 교육에 열의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생활 공간에는 손 짚는 곳마다 책이 있었고, 시온과 리온도 호기심이 왕성하여 온 세상의 지식을 탐독할 것처럼 굴었다. 명석한 남매는 그 방대한 양의 장서를 끝없이 읽어나감과 동시에 다양한 분야의 교원들과 수업도 병행했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선 보기 드문 학구열이었다. 인자한 클라인 부부는 마을 아이들이 원한다면 언제든 남매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해주었다. 따스한 배려심이었다. 덕분에 수혜 아닌 수혜를 본 건 벨리사와 그의 언니 케이트였다. 케이트는 틈만 나면 클라인 가에서 책을 빌려 읽었고, 벨리사는 시온과 리온의 옆에 끼어 수업을 듣길 즐겼다. 수업 내용보다도 두 사람과 무언가 함께한다는 점을 좋아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개중에 벨리사가 강한 흥미를 느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검술이었다.

“우왓.” 딱! 소리와 함께 벨리사의 목검이 떨어졌다. 그는 냉큼 떨어진 검을 주워 들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한 번 더 하자!” “벌써 세 번째인데….” “에이, 한 번만 더.” 검술 수업의 끝을 대련으로 마무리하는 건 어느새 그들 사이의 규칙처럼 자리 잡았다. 검을 처음부터 능숙하게 다룬 건 리온이었으나 놓쳤을 때 다시 주워 드는 건 벨리사여서, 이들의 대련이 언제 끝날지는 전적으로 벨리사의 기분에 달려있었다. 그 꾸준함 때문일까? 처음에는 한 합으로 끝나던 대련이 점점 길어지더니, 요즈음에는 리온의 검을 떨어뜨리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아.” “아자!” 바로 지금처럼. 리온이 떨어진 검을 내려다보자 벨리사가 먼저 그 검을 주워 리온에게 내밀었다. “한 번 더?” “음… 봐주면 안 될까.” 지켜보던 선생님도 오늘은 이만하자며 벨리사를 만류했다. “아하하.”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땀투성이 얼굴로 벨리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즐거운 날들이었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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