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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 산길을 벗어난 벨리사가 양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을 입구를 지키는 위병이 보였다.
“고생했어.”
위병을 본 리온이 벨리사에게 손짓했다. 벨리사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는 수풀을 헤치며 걷느라 풀어진 벨리사의 로브를 다시 꼼꼼하게 둘러주고 후드까지 씌워주었다. 익숙하게 그의 손길을 받은 벨리사가 그에게 한 번 웃어주고는 손목에 묶어두었던 손수건을 얼굴에 둘렀다. 그렇게 채비를 마치고 나서야 둘은 나란히 마을 입구로 향했다. “여행자가 많이 들리는 곳은 아닌데, 먼 곳까지 왔네.” 복면까지 쓴 모양새가 상당히 수상해 보였으나, 위병은 그다지 그 모습을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는 산을 넘어온 여행객이라는 말에 험한 산을 넘어왔다니 대단하다며 둘을 추켜세우기만 할 뿐이었다. 인사 몇 마디를 건네고 나자 두 사람은 곧 마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인파가 많은 거리에 들어와서야 벨리사는 손수건을 풀어 다시 손목에 묶었다. 여관까지 가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그 시선들은 벨리사가 후드를 푹 눌러 써 얼굴을 가리면 금방 사라지고는 했다. 마을에서 보기 드문 여행자의 행색을 했다고 모이는 이목이 아니라는 뜻이다.
“매번 불편하지?”
이럴 때마다 벨리사는 드물게 위축된 태도를 보였다. 리온은 후드 위로 벨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누르며 말했다.
“괜찮아.”
언제까지고 그런 날들이 계속될 것 같았다.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는 평범한 날들이.
허나 시간이란 건 인간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라, 몇 해 전에는 거짓으로 판명 난 일도 진실이 되고는 했다. 노쇠한 클라인 부부에게 요양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 마을도 요양에만 힘쓰기에 조건이 나쁘지 않았으나, 부부는 눈앞에 일이 있으면 움직이고 싶어진다며 공방을 그대로 두고서 옆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공방은 자연스럽게 시온과 리온이 물려받았다. 워낙 다재다능한 남매여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 처리는 클라인 부부가 있을 때와 다르지 않게 매끄러웠다. 누군가 무례하게 행동하려 들면 어린 애들한테 그러고 싶냐며, 벨리사의 부모님이 면박을 준 것도 한몫했다.
그렇게 새로운 클라인 공방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무렵, 시온으로부터의 선언이 있었다. 벨리사. 나, 떠나기로 했어. 벨리사는 깜짝 놀라 그와 함께 찾아온 리온을 바라보았다. 리온과는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그는 시온의 말에도 놀라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일찍부터 시온은 모험을 떠나고 싶어 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을 떨칠 수 없다고 했다. 시온은 본인이 행하는 모든 일에 마음을 쏟는 사람이라, 벨리사는 이 모험이 아주 오래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 작은 영지의 바깥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 얼마나 많을까? 시온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는 벨리사를 꼭 안아주었다. 편지할게. 너무 걱정하지 마. 종종 돌아올 거야.
“리~온. 아직 많이 남았어?”
“조금.”
시온이 떠나도 리온의 생활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면 그는 대체로 혼자 시간을 보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직업이고, 그들을 상대하는데 어려움을 느끼지도 않았지만 개인적인 교류는 이웃인 벨리사의 가족에 그쳤다. 여가의 대부분은 공부에 시간을 쏟았는데, 그런 리온의 공부를 방해하는 건 벨리사의 주된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리온의 집중력은 벨리사의 소심한 훼방에 끊어질 만큼 얄팍한 것이 아니어서 벨리사는 언제나 그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리고는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공부하는 건 뭐더라. 저번에 들었었는데…. 다재다능한 리온은 공부하는 분야가 시시때때로 바뀌곤 했다. 매사 무던하게 구는 리온이 그나마 진득하게 손에 쥐고 있는 건 마법이었는데, 벨리사는 그것이 학문적인 관심보다도 실용의 측면이 아닌지 의심하고는 했다. 리온 혼자서 이 큰집을 관리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마법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었다. 창밖을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해 질 녘에는 방에서 나오겠지? 어릴 적부터 제집처럼 드나든 리온의 집이다.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낼 방법은 무수히도 많았다. 쿠키는 어제 구웠으니까, 오늘은 책을 읽어볼까…. 벨리사는 글줄에는 영 관심이 없었으나 왕국에 얽힌 전설이나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읽는 건 좋아했다. 시온이 모험을 떠난 뒤에는 부쩍 더 손이 갔다. 언니도 이런 여행을 하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 어쩐지 글이 더 잘 읽히는 기분이었다. 모험을 떠난 시온에게까지 생각이 닿자 저번에 읽다 만 여행자의 수기가 떠올랐다. 그 수기는 오랜 예전에 쓰였다 기록되어있는 만큼 허풍이라는 말도 많았지만 벨리사의 관심을 끌 정도로는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오늘 오후는 그걸 마저 읽어야겠다. 벨리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꺄악!”
그로부터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리온은 벨리사의 비명과 뒤이어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 집안에서 들을 일이 없는 소리에 그는 얼굴을 굳히고 서재로 달려갔다. “리사.” “리, 리온~.” 서재 안, 벨리사는 바닥에 주저앉아있었다. 주변에 책이 잔뜩 쏟아진 걸 보면 리온이 들은 둔탁한 소리는 책이 쓰러지면서 난 소리 같았다. 리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물었다. “안 다쳤어?” “으응.” 대답하면서 벨리사는 제 손바닥이나 몸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안 다쳤어. 미안, 놀랐지.” “안 다쳤으면 됐어.” 그는 벨리사를 부축해 일으켰다. 정말로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야?” 벨리사는 무언가를 보고 놀란 사람처럼 다소 얼이 나가 있었다. 주변의 늘어진 책의 모양새도 이상했다. 벨리사가 아무리 부주의하게 굴었대도 바람에 날린 것처럼 책들이 바닥을 구를 리는 없었다. 벨리사는 책 한 권을 가리켰다. 리온이 반사적으로 책을 집어 들려고 하자 벨리사가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아 만류했다.
“그, 일단 만지지 말아봐.”
“왜?”
“그게….”
벨리사는 당황이 가시지 않았는지 횡설수설했으나 리온은 차분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전에 읽던 책을 읽으려다가, 생각보다 더 높이 있어서… 근데 손이 닿을 것도 같았거든? 사다리가 없어도 될 것 같길래, 그냥 뽑았는데….” 요컨대 찾던 책이 아닌 다른 책을 뽑았다는 얘기다. 애써 꺼낸 책이 목표한 것이 아니었다는 허탈감도 잠시, 벨리사는 이 역시 소설책이라면 읽어볼 심산으로 책을 펼쳤다. 내용은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책을 펼치자마자 갑자기 주변이 환하게 밝아지더니 책의 주변으로 돌풍이 일었다. 비명은 그 순간에 지른 것이었다. 설명을 끝까지 듣고 나서 리온은 문제의 책을 손에 들었다. “헉, 괜찮아?” 벨리사는 쭈뼛거리며 그의 뒤에 붙었다. “마력은 남아있지 않은데….”
그것은 마법서였다.
주의를 요하는 책이나 물건들은 전부 지하에 보관해두었다. 그렇다면 이건 책이 지닌 마력이 미약하여 클라인 부부가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펼치면 무작위로 효력이 발동하는 것 같고…. 일회성인가?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리온은 제 옷을 당기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벨리사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큰 사고를 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건 이제 그냥 평범한 책이야.”
“그럼 괜찮은 거지…?”
“네가 괜찮은지는 이제 알아봐야지.”
리온은 엉망이 된 서재를 마법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영창 없이 손짓 한 번으로 마법을 일으키는 리온의 모습은 언제 봐도 신기하기만 했다. 벨리사는 이런 상황에서도 엉뚱한 생각을 해버렸다. 거 봐, 청소 때문 맞다니까…….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이 일은 벨리사에게 약간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문제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려운, 애매한 변화가. 리온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에겐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마력을 운용할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데(“그럼 우리 엄마나 아빠도?” “이론상으로는 그렇지.”), 지금의 벨리사는 몸 안의 마력을 불러일으키려 해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했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바란 적은 없었으니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지 않냐는 벨리사의 말에 리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니까, 어떤 일이 생길지 전혀 예상되지 않아. 그게 문제야.
그 ‘어떤 일’이 무엇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벨리사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 언제나 명랑한 웃음소리를 내는 것 치고는 얌전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마을을 휘젓고 돌아다니는 말썽꾸러기들이나 가만히 있어도 눈에 띄는 클라인 남매와 비교하면 더욱 그랬다. 희박한 존재감에 그는 심심찮게 ‘언제 왔니?’라거나, ‘리사도 있었네.’ 같은 말을 듣고는 했다. 하지만 그날 이후, 벨리사는 무수히 많은 사람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것은 하루로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가 어디에 있든, 무슨 행동을 하든…
사람들은 벨리사를 놓치지 않았다. 시선으로부터 숨을 수 없었다.
맨얼굴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벨리사는 그 한마디로 정리했다. 여행길에 오르며 처음부터 얼굴을 가릴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워낙 존재감이 뚜렷하다 보니 사소한 사건에 휘말리거나 위병들의 오해를 사는 경우가 종종 생겼다. 수배범으로 오인당한다거나, 소매치기 취급받는다거나… 모두가 서로를 알고 지내는 마을에서는 상상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마을을 출입할 때만이라도 주의를 기울이기로 한 것이다.
벨리사는 저 때문에 리온이 곤란을 겪는 건 싫었다.
“여기 맞지?”
“보자, 보자~ 흰사슴 여관, 맞네!”
“이 근방은 여관 이름에 다 동물이 들어가는 것 같아.”
“그러게. 저번에 들렀던 곳은 고래였나?”
“아니, 늑대.”
편지의 주인인 귄체는 흰사슴 여관의 급사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편지를 받고는 아주 기뻐하며 그들의 저녁 식사에 구운 고기 한 덩이를 더 내주었다. 삯을 더 주겠다는 걸 벨리사가 거절하자 그를 대신해서 나온 호의의 표시였다. 며칠간 건량만 먹고 지냈던지라 벨리사는 그 호의를 더 없이 기뻐했다. 김이 오르는 돼지고기 구이, 치즈를 위에 올린 으깬 감자, 오리고기를 곁들인 양배추 버섯샐러드와 오믈렛 등이 차려진 식탁을 보고 식욕이 좋은 벨리사는 물론이거니와 리온도 갓 만든 따뜻한 음식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이윽고 들어간 방의 침구는 짚을 새로 채워 넣은 티가 나 귄체의 호의가 저녁 식사에 그치지 않았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침에 고맙다고 해야겠네.”
“응. 우와, 눕자마자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것은 리온 역시 마찬가지여서, 고른 숨소리가 방안에 울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잘자, 리온. 오늘도 수고했어.
…….
하하, 벌써 잠들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