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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온도 떠나보지 않을래?”
시온은 편지도 없이 불쑥 마을로 돌아왔다. 연락하고 오려고 했는데, 편지보다 자기 발이 더 빠를 것 같았다나. 마법에 출중하고 자연의 사랑을 받는 시온의 말이니 아무렴 그렇겠거니 싶었다.
“같이?”
“나랑 같이 가고 싶어?”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건 시온과 동행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굳이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단 의사 표현에 가까웠다. 사랑스러운 동생의 마음을 모르지 않아서 시온은 그저 작게 소리 내 웃었다. 사실 방금 리사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오는 길이야. 리온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온.”
그날은 벨리사가 그들 남매를 찾아온 날이었다. 시온을 반기러 온 거겠거니, 어렴풋 생각하고 문을 연 리온은 벨리사의 표정을 보고 얼굴을 굳혔다. 리온….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이 열려도 안으로 들어올 생각조차 못 하는 듯 보였다. 리사, 들어와. 우두커니 서 있는 벨리사를 안으로 끌어들인 건 시온이었다. 그제야 그는 시온의 품에 안겨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서러운 울음이었다.
사람들이 군중 속에서 자신만을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벨리사는 전에 없던 일이 두려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일한 마음도 가졌다. 단순히 눈에 띄는 것뿐이라면 살아감에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나, 하고. 약간의 불편은 감내할 수 있는 정도였다. 이만하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마법서에 담긴 마법이 무시무시한 저주였다면 벨리사는 지금과 같은 생활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삶이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내게 일어난 변화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어린 벨리사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벨리사가 아무리 클라인 가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건 그의 언니 케이트였다. 생김새부터가 꼭 닮은 자매는 서로를 무척이나 아꼈다. 연년생 형제란 때론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 마련이기에. 케이트가 있는 자리에는 벨리사가 있었고, 벨리사가 있는 자리에선 케이트를 찾을 수 있었다. 떨어져 있더라도 행방을 모르는 법이 없었다. 성향에 사소한 차이가 있긴 했으나 그건 자매의 우애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벨리사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기 전까지는.
꼭 한 몸처럼 지내던 자매에게 이 일은 커다란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눈에 띈다는 이유로 케이트보다 벨리사를 먼저 찾기 시작했고, 그건 그의 부모도, 케이트와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케이트의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동생이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감춰지게 된 것이다. 하나였던 바위에서 떨어져나온 돌멩이가 된 기분이 아니었을까. 바위는 여전히 그 자리에 변함없이 서 있는데도.
시온은 벨리사에게 일어난 일을 자세하게는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리온에게 부연 설명을 요청했다. 벨리사는 서러움에 잠겨있으면서도 케이트가 자신에게 한 말이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자매 사이에 찾아온 변화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는 억울함을 토로한다기보단 자신을 탓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원해서 얻은 능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리사, 산책 갈까.”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 시온은 물에 적신 손수건으로 눈물로 얼룩진 벨리사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권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주 일상적인 말투였다. 이대로라면 집에 바로 갈 수 없잖아. 같이 걷고 나면 기분도 나아질 거야. 벨리사는 전부터 시온의 말이라면 껌뻑 넘어가는 경향이 있어, 순순히 그의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단순히 벨리사를 달래기 위해 나간 줄 알았건만 그런 이야기를 했다니. 리온은 잠자코 시온의 말을 기다렸다.
“케이랑 떨어져 지내보는 것도 리사에겐 나쁜 일이 아닐 거야.”
최근 들어 벨리사는 전과 행동거지가 많이 달라졌다. 얌전한 빵집 아이라는 별칭은 옛말이라는 듯 오지랖 넓게 온 마을의 일에 손을 얹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에 익숙해져 그런가 싶었는데, 케이트와의 일도 무관하지는 않은듯 했다. 무엇을 해도 주목을 떨칠 수 없으니 억지로 힘을 내는 것일까?
“리사가 무슨 선택을 할지 궁금하지 않니?”
“뭐, 걔라면….”
“리온, 나 떠날 거야.”
그건 언젠가 들었던 시온의 선언과 비슷했다. 며칠 전 시온과의 대화에서 이 말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리온은 그다지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눈을 치켜뜨는 것으로 벨리사에게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시늉을 했다. 헤헤, 놀랐어? 그 표정을 본 벨리사가 샐쭉 웃었다.
“언제.”
왜냐고,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벨리사는 그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지 못했는지 당장의 질문에만 또박또박 답변했다.
“음~ 사흘쯤 뒤에.”
“준비할 게 많을 텐데.”
“시온 언니한테 배워뒀지.”
나 몰랐는데, 마을을 나가려면 영주님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언니가 아니었으면 그냥 나갈 뻔했지 뭐야. 그렇게 말하며 웃는 벨리사는 당장 내일이라도 떠나고 싶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를 부추긴 시온은 벌써 나흘 전에 마을을 떠났다. 리온은 시온과 벨리사 사이에 정확히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그가 시온을 용케 따라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있잖아. 벨리사가 주저가 섞인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리온도 같이 갈래?”
묘하게 자신이 없는 권유였다. 시온과 리온은 남매이면서도 성향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분명하게 달랐다. 닮은 점이야 분명 있지만 타인의 시선에선 차이점이 더욱 두드러지는 법이었다. 가장 큰 예로, 시온은 매사 의욕적이고 활기찼지만 리온은 무엇에 흥미를 가지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가 가진 특유의 여유는 주변을 건성으로 대한다는 오해를 사기가 쉬웠다. 벨리사는 스스로가 그의 예외임을 알았으나, 자신의 권유를 어디까지 받아줄지는 리온 혼자만이 아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리온은 말이 없었다. 이 애는 떠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구나. 이런 점은 정말 시온 언니랑 다르다니까.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벨리사가 씩씩하게 외쳤다. 에이, 그럴 줄 알았다. 나 다녀올 테니까,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로부터 사흘 뒤, 마을의 초입.
“가자며.”
리온은 그 자리에 나와 있었다. 간소하게 꾸린 짐이나, 벨리사를 향해 대뜸 하는 말로 미루어보아 배웅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리에 멈춰선 벨리사를 재촉하듯 리온이 말했다. 얼른 가자. 지금 출발해야 저녁엔 옆 마을에 도착해. 벨리사가 빠른 걸음으로 그의 옆에 따라붙었다.
“안 나올 줄 알았어.”
“뭐… 나도 보고 싶긴 했어, 시온처럼.” 넓은 세상을. 끝까지 하지 않은 말을 알아듣고 벨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방은?”
“납품은….” 꼬박 밤을 새웠는지 리온이 가볍게 하품했다. “납품은 다 했어.”
“리온 없어서 사람들이 놀라겠다.”
“뭐, 자리 비운다고 써두긴 했으니까… 아.”
리온이 벨리사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얇은 가죽끈에 나무로 깎은 펜던트가 걸린 목걸이였다. 펜던트는 새의 날개 모양이었는데, 이건 리온이 가장 잘 자신 있게 깎는 조각 중의 하나였다.
“어라, 나 주는 거야?”
“재료가 남아서. 전에 준 건 이제 그만 하고 다녀.”
목공을 배울 무렵 리온은 처음 깎은 펜던트를 지금처럼 목걸이로 만들어 벨리사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벨리사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목걸이를 걸고 다녔는데,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는 지금 그 투박한 펜던트가 계속 눈에 밟힌 모양이었다.
“안 돼. 내 보물이거든.”
벨리사는 웃으며 새로운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두 펜던트가 나란히 겹쳤다. 리온은 그 모습을 지긋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어디까지 갈 생각이야?”
“글쎄….” 벨리사는 말을 늘였다.
보더라인까지 가볼까. 관용적인 대답이었다. 목적지가 없거나 갈피를 찾지 못할 때 왕국의 사람들은 보더라인을 언급하고는 했다. 보더라인은 왕국 서쪽에 있는 거대한 산맥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그곳을 향했다가 돌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고 하여 통념적으로 세상의 끝으로 여겨지는 곳. 그곳까지 향하는 사이에 목적이 생길 거란 의미에 가까웠다. 결국에는 발길 닿는 대로 걷겠다는 소리다. 이야기의 소재로나 쓰이는 곳을 진지하게 찾아가겠다면 그것 역시도 문제였다. 리온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일 년만이야.”
“응?”
“일 년만 같이 다녀줄 거라고. 그다음은 알아서 해.”
“아하하, 응!”
왕국력 240년, 봄.
작은 마을에 소란이 일었다. 빵집 근처의 공방이 다시 빈 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뜬 소문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하였으나… 마을을 떠난 리온과 벨리사가 그 소문을 듣는 것은 앞으로 한참 뒤의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