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슨….”
“자, 이제 이거 써야겠네!”
받을 보상이 보이지 않자 행패를 부린 셈이다. 그는 뭐가 그리 우스운지 깔깔 소리 내어 웃어 재끼다가 상대에게 검을 넘겨주었다. 꼴이 이런데 뭘 받겠어? 나중에 주고 싶은 거 있으면 찾아오든지. 나 이거 기억해둔다! 이래 봬도 기억력 좋거든. 기사는 별 희한한 사람 다 봤다는 눈치로 그를 보다가 검이 급한 건 사실이었으므로 메이지에게서 검을 건네받았다. 검을 손에 쥐여주니 아까보다는 꼴이 조금 나았다. 흐리멍덩한 눈이 조금은 생기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착각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메이지는 이 상황이 제법 즐거웠다. 이 칙칙하고 황량한 전쟁터에서 이런 사소한 재미 정도는 추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주었다.
“날 잘 드니까 수염도 좀 깎고, 엉? 차려입으면 잘 생겼을 것 같은 사람이.”
아, 당신이 내 취향이란 말은 아니니까 걱정 마!
기억하겠다 호기롭게 소리쳐놓고 메이지는 금방 이 일을 잊었다. 넘겨준 검도 곧 죽을 얼굴의 기사도 그에게 인상깊은 것은 아니었다. 공성은 지난했으나 시간이 흐르자 데아 기사단이 승기를 잡았다. 본데일의 보급로를 전원 차단했으니 이는 당연한 흐름이었다. 자신을 지켜주는 성벽 안에 갇힌 본데일의 군은 영지민을 굶겨 죽일 수 없다며 항복 의사를 전했다. 여전히 목이 붙어있는 귀족과 각지에서 모인 반역자의 사병과 영지의 처리는 기사단이나 행정관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용병들은 데아 기사단이 열어준 연회를 거나하게 즐기고 각자의 보수를 챙겨 본데일을 떠났다. 메이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은 기억이라곤 술과 고기, 그리고 그 앞에서 체면치레하고 서 있는 데아 기사단의 어두운 낯짝을 보고 비웃은 일 따위다. 그들이 두둑하게 챙겨준 금화를 들고 직후엔 어디를 갔던가. 당초 생각했던 북쪽이었나, 아니면 다시 수도로 돌아갔던가. 이제는 걸어 다니기가 지겹다고, 가는 길에 말을 구해 서쪽의 황량한 들판을 달렸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이 모든 건…
그가 바다에 닿기 전의 일이다.
그리고 지금.
“그러니까….”
대륙의 최남단 써드빌. 밭에서는 뜨거운 햇살과 바닷바람을 견디며 과일이 영글고, 해변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그곳을 지키는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의 단장, 오즈월드 펄 써드는 부하들의 보고를 듣고 별 황당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원흉인 메이지는 미남의 기가 찬다는 표정을 보고도 별 타격이 없는 듯, 종전과 변함이 없는 어조로 쾌활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아, 내가 너무 빨리 말했나? 못 알아들었어? 메이지는 방금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오즈월드가 순식간에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다. 애초부터 그에게 넘어오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메이지의 옆으로 서넛의 단원들이 더 서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 단장을 위해 메이지의 말을 멈출 수 있을 만한 참된 인재는 선써드 내에 없었다. 오즈월드에겐 비극적인 일이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냐면….”
그날, 그러니까 어제. 메이지는 오후 교대조였다. 물론 업무 시간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선루스 기사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그게 부단장이라 할지라도. 그는 마을을 순찰하다 마주친 단원 몇과 주민 몇몇을 모아 술집으로 향했다. 술집 주인으로부터 ‘선대가 창고에 처박아둔 좋은 포도주를 이제야 발견했는데 메이지 몫 몇 개 빼둘까?’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부터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메이지야 갓 딴 포도를 으깨놓기만 한 물건이라도 좋다고 마셨지만 절대 주는 술을 마다하는 자가 아니었다. 술은 그냥도 좋은데, 좋은 것이라니 더 좋겠지. 그리고 술을 한 번에 몇 병이나 비우는 것치고는 잘 취했고, 취하면 많이 들뜨고 많이 웃었다. 별스러운 기행을 벌이기도 했다. 자, 봐. 그는 묘기를 보여주겠다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언젠가부터 메이지가 들고 다니는 비싸 보이는 검이었다. 테이블 위에 올라선 메이지는 손짓 몇 번에 검 손잡이로 와인 병의 코르크를 땄다. 명검이 코르크 따개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메즈, 가만두면 또 저런다니까. 제인이 잘 구운 소시지를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 말처럼, 몇 번 그 재주를 본 단원들은 익숙하다는 듯 그 행태를 바라보았지만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박수가 터져 나왔다. 술이야 어차피 따놓으면 다 먹어 없앨 것이기 때문에 메이지는 몇 차례 그 짓을 반복했다. 그러다……
쩡, 하는 소리와 함께 검날에 금이 갔다. 그가 보여준 묘기가 단순해 보여도 힘이 많이 들어가는 행동이었는지, 평소 휘두른 습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은 금에서 멈추지 않고 날 전체로 퍼지더니 산산이 부서져 온 사방으로 튀었다. 만취한 상황에서도 메이지는 기민하게 반응했다.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어 쏟아지는 파편을 전부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쳐낸 것이다. 아까보다도 더 묘기 같은 광경에 사람들은 다칠 뻔했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하고 다시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그러니까.”
그즈음 오즈월드가 드디어 메이지의 말을 자르고 다시 한번 운을 띄웠다.
“망가지기 시작한 검으로 와인을 따다가 부서진 파편을 받아낸 걸로 박수를 받으며 과음하느라 옆집에 불난 걸 모르고 있었다고?”
“요약하면 그렇네.”
보기 드문 구경에 주인은 메이지에게 공짜로 와인 몇 병을 더 내주었고 술자리는 밤이 늦은 시간까지 계속되었다(그것들은 평범하게 코르크를 땄다). 마을에서 불을 밝힌 곳이 술집밖에 남지 않았을 무렵, 누군가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술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불이야! 주정뱅이들은 그 외침을 단박에 알아듣지 못했다. 어, 술? 남았지. 앉아, 앉아. 아니, 헛간에 불이 붙었다고!
다행스럽게도 피해는 헛간 하나가 까맣게 타들어 간 걸로 그쳤다. 술기운에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이들이 불이라는 말에 모두 밖으로 뛰어나가 물을 길어온 덕분이었다. 연기가 고여 그을음이 남은 집을 다시 쓰려면 보수를 해야겠지만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게 어딘가. 위층에서 잠을 자던 아이는 벽을 기어올라 자신을 구하러 온 메이지를 숫제 영웅처럼 섬기게 되었다.
검을 깨 먹은 것부터가 이마를 짚을만한 일인데 어쨌든 불은 껐고 다친 사람은 없으니 되지 않았냐며 메이지는 단장실에서 뒷짐을 지고 삐딱하게 선 채로 휘파람이나 불었다(“근데 메이지, 나 그거 하나 맞은 거 같아요.” “진짜? 어디 봐.” 세이런 말에 상처를 찾는답시고 사람을 이리저리 돌리는 모습이 또 주변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그는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차고도 단장실을 찾는 일이 드물었는데, 한 번 왔다 하면 이런 식으로 황당한 이야기를 남겨 폭풍처럼 실내를 휩쓸었다. 씩 웃는 메이지의 얼굴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에게 기사도를 바라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손 남는 녀석들은 가서 도와주라고 해. 이상.” 뭐, 그랬다. 오즈월드는 본래 부하를 길게 질책하는 법이 없는 상관이었으므로 결론만큼은 간단했다.
“이상이란다, 가자!”
메이지가 의무실에 가라며 세이런부터 바깥으로 몰아내자 다른 단원들이 차례로 그 뒤를 따랐다. 근데 어제 술값 누가 냈어요? 난 안 냈는데, 낸 사람 있어? 나도 아냐. 하나 같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이 도통 기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단복만 걸치고 있으면 뭐 하나, 무전취식범이 따로 없는 것을.
“맞다, 단장.”
“보고가 남았나?”
“아니, 나 검 좀 줘.”
오즈월드는 부단장에 대한 평가를 정정했다. 그는 그냥 날강도였다.
“이건 돌아가신 선대 써드 백작이 남겨준 유품인데.”
그리하여 오즈월드의 책상 위에 날이 부서져 손잡이만 남은 검이 올라왔다. 음각으로 새겨진 가문의 문장이 검의 원주인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오, 유감이야.”
“전쟁통도 아닌데 날이 이런 식으로 망가지는 건 처음 보는군.”
“그러게 말이야. 이거 순 엉터리 검 아니야?” 메이지는 유품이라는 얘기를 듣고도 애석해하는 기색도 없이 검과, 나아가서 그 검을 건네준 오즈월드를 비난했다. 이거 나 부단장 잘하라고 준 거잖아~ 메이지가 시장 바닥에 드러누운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며 떼를 썼다. 아니, 써드빌의 어떤 어린아이도 이런 식으로 굴진 않을 것이다. 메이지는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 드러누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오즈월드가 원해서 준 검도 아니었다. 그는 좋아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남이 차고 있던 검을 갈취했다는 과거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메이지 군, 보검이 무슨 의미인지 아나?”
오즈월드가 진중함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제 기사를 지긋하게 바라보았다.
“비싸고 잘 든다?”
“오래되었다는 뜻이라네.”
“오….”
그러고 보면 전조는 있었다. 메이지는 아침을 회상했다. 검날을 닦고 햇살에 비춰보았을 때 그는 묘한 얼룩을 발견했다. 그 얼룩은 지워지지 않고 그럴싸하게 검날과 어울려, 본래부터 검에 아로새겨진 무늬같이 보였다. 이런 게 있었던가? 오래 써서 생긴 걸지도…. 훈련장에서 주워 쓴 검이었다면 대번 내버렸겠지만, 검의 출처가 출처다 보니 메이지는 안일하게 그 얼룩을 보고 넘겼다. 무늬가 아니라면 나중에 갈아내면 되겠지, 하고.
“그냥 무늬인 줄 알았는데….”
“훈련장의 검은 성에 차지 않나?”
혼잣말과 오즈월드의 물음이 겹쳤다. 뭐라고 했지? 메이지는 혼잣말이라곤 한 적도 없는 사람처럼 오즈월드의 질문에만 대답했다. 당연히 성에 안 차지!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은 언제나 인력 부족으로 훈련장에는 남아도는 무기가 많았다. 주인 없는 무기 역시도 주기적으로 손질해주긴 했으나 쓰지 않는 날붙이는 손을 탄 것보다 쉽게 상했고 써드빌의 바닷바람이나 따뜻한 기온과는 극악의 상성을 보였다. 당연히 손질하면 못 쓸 건 없지만 메이지는 그걸 언제 손질해서 언제 길을 들이냐고 투덜거렸다.
“괜히 좋은 검을 줘서 버릇을 잘못 들였어.”
“그래, 다 단장 탓이야.”
장단을 맞춰주자 메이지는 겸양도 모르고 오즈월드를 힐난했다. 이렇게 말하지만 오즈월드는 메이지가 손에 잡히는 무엇으로도 사람의 급소를 찌를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안다. 메이지도 단장이 지금 자신의 생떼를 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러니 더 물고 늘어지는 것이긴 해도. 오즈월드는 무언가를 고민하듯 턱을 괴고 반토막이 난 검을 내려다보았다.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이 고개를 기울이자 이마를 스치고 흘러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메이지는 그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아 책상 위로 발을 올렸다. 예의라곤 조금도 보이지 않는 자세로 그는 숨도 쉬지 않고 칭얼거렸다. 단장은 맨날 푼돈은 돈도 아니라며, 검 하나 얼마 한다고. 다른 애들한테도 기분 좋으면 턱턱 내주면서, 쫌생이, 구두쇠.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오즈월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제는 검이라고 부를 수 없는 물건을 다시 메이지에게 던져주었다.
“안 그래도 생각하던 게 있어. 같이 좀 가지.”
“응? 응. 어디 가는데?”
“일단 따라오게.”
오즈월드는 그에게 시간이 되냐는 질문은 예의상으로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메이지의 상관이었고 선써드의 기사는 남는 게 시간이었으므로.
오즈월드도 남에게 일을 떠넘기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으로 이번 일의 보고서는 아드리안에게 맡겨버린 듯했다. 목적지는 본데일. 본데일이 어디더라…. 길이야 단장이 잘 알겠지. 메이지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겠다는 오즈월드의 통보를 받고 메이지는 시간에 맞춰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는 타고 갈 말을 고르기에 앞서 털이 반질반질한 조랑말에게 당근을 챙겨주었다. “데이, 착하지.” 이 조랑말은 메이지가 근처 도시의 영주를 호위해 준 뒤 그와 술 내기를 펼쳐 상으로 받아온… 유서가 깊다고 해야 할지 희한한 말이다. 이름은 테사가 지었다. 써드빌에는 웬즈데이라는 말이 있고, 이 말은 그 말보다 작으니 데이가 어떻겠냐고. 연관성은 전혀 모르겠으나 대안이 없으면 조랑말의 이름이 오트밀, 머쉬룸, 혹은 너츠(전부 메이지가 제시한 이름이다)가 될 상황이어서, 그때부터 조랑말은 데이가 되었다. 메이지는 조랑말을 오트밀이라 부르지 못하게 되어 못내 아쉬워하는 듯했으나… 아무튼 데이를 꽤 예뻐하는 편이었다. 그는 언제나 동물들과 친근했다. 데이만 당근을 챙겨주었더니 잠에서 깬 말들이 투레질을 시작해 결국 가져온 당근 한 바구니를 다 비웠다. “녀석들. 건강하네!” 그중 한 마리를 골라 밖으로 나오니 해가 뜨고 있었다. 희게 빛나는 해가 떠오르자 도시가 시시각각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매일 찾아오는 기적의 순간이다.
“계속 달려서 갈 거니까 용건이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그 기적을 뒤로 하고 오즈월드가 나타났다.
“우리 지금 전쟁통이야? 뭐가 그렇게 급해?”
말에 오르자 오즈월드는 몇 마디 말도 없이 말을 몰았다. 하는 수 없이 메이지도 그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대신 그의 옆으로 바짝 말을 붙이며 큰 소리로 수다를 떨었다. 단장!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봐. 대답이 돌아오든 않든 신경도 쓰지 않는 그 행태에 오즈월드가 잠시 속도를 늦췄다. 메이지에게는 몇 가지 사소한 재주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마차나 말 위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혀를 씹지 않는 것이었다.
“상관이 음유시인인 줄 아나.”
“에이, 딱딱하게 굴지 말고. 대장간에 마지막으로 간 건 언제?”
오즈월드는 날을 헤아리는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야 할 정도로 오래 안 갔다고?”
“글쎄, 10년 전에는 갔었나.”
“오, 이젠 단장이라고 대장간은 직접 안 가신다~”
메이지가 소리 내어 웃었다. 오즈월드는 그의 웃음과 비아냥을 무시하곤 다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아, 단장~ 같이 가! 혼자 저 멀리 앞서 나간 오즈월드를 메이지가 순식간에 뒤쫓아 따라붙었다. 써드빌에서 본데일까지는 말을 달려 반나절. 가는 내내 지금 같은 대화를 반복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