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써드빌에 남아있을 겁니다. 전쟁에서 활약한 건 나도 아니고, 내 기사들이기도 했고.”
“경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수도에 정이 떨어진 것도 알고 있어.” 무심하게 얘기하는 칼립소를 보면 뻔했다. 그녀야말로 아르베스의 말을 옮기는 것뿐이고, 진정으로 오즈월드가 이브리얼 기사단의 보직을 맡기를 원하지도 않고, 그럴 거라고 믿지도 않는 듯했다.
“하지만 선써드의 기사들에게도 명예의 기회는 있어야지. 수도로 올라갈 자격이 되는 군들은 재량껏 내게 보내. 내가 책임지겠다.”
아마도 칼립소에게 보내지는 것은 커다란 기회일 것이다. 칼립소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줄을 탔다.
용건이 끝난 후에는 추억 이야기나 나눌만한 여유도 두사람에겐 없었다. 하지만 칼립소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면 들어줄 의향은 있었다. 한쪽 손목 없이 말은 어떻게 타는지, 어떻게 여전히 수도로 돌아와 헌신할 마음이 남아있는지, 굳이 자신을 부른 건 그 젊은 왕의 기지인 건지 칼립소의 뜻이었는지. 그녀도 마찬가지로 할 말을 찾는 듯 오즈월드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 검이 안 보이네. 그 써드 백작의 보검말이야.”
그 말에 버릇처럼 허리춤을 더듬었다. 가문의 문장이 손잡이에 음각으로 새겨졌던 그 검은 10년 넘게 주인을 지키다 곁을 떠난 지 좀 지났다.
“써드빌에는 적당한 검이 많지 않아서, 내 기사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래? 새로 장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전부 바꾸고 그것까지 청구해.”
아마 예상이 갔을 것이다. 굳이 버리거나 바꿀 일이 없는 명검이 제자리에 없다면 해 먹었거나 누구 줬을 텐데, 어느 쪽이든 남쪽 끝 기사단의 허술함이 티가 났을 것이다. 결국엔 이것도 너그러운 수도방위대장의 처사이자 마지막 용건이었다.
오즈월드는 심드렁한 얼굴로 왕성을 떠났다. 재정비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다듬어진 돌로 매끈하게 깔린 길을 깃털처럼 굴러가는 마차에 타서 생각했다. 수도가 좋긴 좋아. 써드빌에서 마차를 타면 이를 악물고 있는 편이 좋다. 격하게 흔들리는 마차에서 잘못하면 혀를 깨물기 때문이다. 써드빌에 이런 도로를 깔겠다고 하면 지금보다 세수를 40배는 더 걷어야 할 것이다. 갑자기 대머리가 낫는 온천수가 발견되어 수도에서 사흘 꼬박 말을 달려 올 만한 가치의 관광지나 별장을 짓지 않는 이상 영원히 써드빌은 혀 깨물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하는 곳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 거주하는 기사들은 칼립소가 보기엔 전쟁의 주역이면서도 목가적인 분위기를 가진 사람들이 분명히 맞다. 하지만 기사들은 전부 명예를 원하나? 순진하고 수명도 길지 않은 우리 촌놈 기사들도 명예가 뭔지 알기는 알까?
수도에서 최남단인 써드빌로 내려오는 기나긴 여정 중에 내내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엔 피곤함에 절은 채로 선써드에 도착했을 때 마주친 건 부단장인 메이지였다. 그녀는 양손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루를 쥐고 있었는데 바닷물인지 비린 냄새가 났다.
“어, 단장! 왜 이제 와? 어디 갔어? 내가 또 끝내주는 전복을 캤는데 말이야.”
명예는 무슨… 아마 멍게는 알 것이다.
“내가 도트라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운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 그동안 내 소재도 모르고 있었던 건가?”
“아, 그런 거였어? 말하지!”
말했다. 수도로 간다고 세 번 정도 통지했다.
“재밌게 놀다 왔어?”
“경, 나는 놀다 온 것이 아니야.”
“그럼 뭐 하러 다녀왔는데?”
이브리얼 기사단의 지휘관 자리를 제안받고, 그게 내키지 않는다면 휘하의 기사들이라도 수도에 보내라는 제안을 받았다는 말을 그다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세이런 같은 녀석한테나 얘기하면 단장이 없으면 써드빌은 어떡하냐는 말이라도 듣지 메이지 같은 사람에게 할 말로 적절하지는 않았다.
“자네, 혹시 명예를 갖고 싶나?”
“이거 이거, 단장. 수도 갔다 왔더니 겉멋 들었네!
정말 뭐라고 대답할지 알 수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오즈월드가 가만히 서서 보고 있자 메이지가 머쓱하다는 듯이 굴었다.
“용병단 출신에게 뭘 물어보는 거야.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
“전복이 많아서?”
“그래, 이거 받아!”
그리고 자루에서 커다란 전복을 세 개 꺼내서 오즈에게 건넸다. 물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전복을 받아든 다음에는 메이지가 점점 멀어졌다. “버터에 구워 먹으면 맛있어. 그럼 안녕!” 근무 시간인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지.
과일나무 모종은 써드빌로 모이고 사람은 도트라로 모이는 것처럼, 굳이 여기에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명예를 주겠다고 해봤자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일 테다. 묻지 않아도 안다. 명예든 그보다 못한 것이든, 이곳에 자발적으로 남지 않은 이는 없다. 유구하게도 써드빌은, 오즈월드를 빼고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선택하고, 선택받는 장소이다. 그러니 오즈월드는 돌아다니면서 나라를 지킨 마법사이자 기사들에게 명예를 원한다면 당장 수도로 올려보내, 최정예 기사단인 데아든, 수도 방위대인 이브리얼이든 꽂아주겠다, 이런 한적한 시골 도시의 자율방범대 같은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이 아닌… 하고 말을 붙여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너 없으면 선써드 망해… 같은 이기적인 이유는 절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써드빌은 그 누가 없어져도 알아서 살아남을 마을이다. 불이 나면 주민들이 끄겠지. 말을 잃어버리면 평원 한번 돌아본 녀석이 집으로 저벅저벅 찾아오겠지. 자발적으로 영원히 이 따끈한 마을에서 요양하기를 선택한 기사들에겐 시간 낭비 같은 질문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망가지기 시작한 검으로 와인을 따다가 부서진 파편을 받아낸 걸로 박수를 받으며 과음하느라 옆집에 불난 걸 모르고 있었다고?”
부단장에게 이런 보고를 받는 내 심정도 고려해줬으면 한다. 그러고 보니 칼립소 경이 새 검을 맞추라고 했던 말이 마치 이를 위한 포석처럼 여겨졌다. 단지 검 때문이 아니라 수도에서는 전투로 인한 피해라든지, 서네스 섬에 비밀에 대한 상세한 보고라든지, 어떻게 몇 안 되고 대단치 못한 한량 같은 기사들이 그런 역량을 냈는지에 대해 소상한 감상을 원하는 듯했지만 못 들은 척 무시하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수도에서 여기까지 내려오는데 나흘은 꼬박 걸리는데, 독촉하라면 해보라지 하는 마음도 없잖아 있다. 검부터 맞추지, 뭐.
메이지는 선대 써드 백작의 유품인 보검을 당차게 모욕했다. 오래됐고, 이상한 얼룩이 무늬인 줄 알았고, 평소에도 와인 코르크 따개로 썼으며… 이만큼 하는 칼을 새것으로 하나 더 달라는 이상한 요청까지 했다. 써드빌에는 검을 제대로 제련할 줄 아는 대장장이가 없다. 칼을 만들라고 하면 버터나이프를 진상할 테고, 낫이나 괭이보다 무딘 것이 완성될 것이다. 그 칼로 낫을 든 농부랑 싸우면 아마 누구나 질 것이다.
수도에서 써드빌까지 내려오며 지나친 곳이 문득 기억이 났다. 메이지는 맞은편의 의자를 당겨 앉은 다음에 양발을 책상에 걸치며 껄렁댔다.
“안 그래도 생각하던 게 있어. 같이 좀 가지.”
“응? 응. 어디 가는데?”
오즈월드는 메이지에게 내일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겠다고 이르고 잠깐의 여유시간을 줬다. 이동하는데 말을 타고 반나절이 걸리는 거리의 마을이다. 목적지는 ‘본데일’이라고 하는데 메이지는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어봤다는 기시감이 든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어디서…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해가 뜨기 직전에 써드빌은 온통 보라색이 된다. 매일 같이 봐도 신비로운 광경이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 적지는 않았다. 메이지가 기사단 앞에서 말에 올라탈 때 오즈월드는 여명을 뒤로 하고 언덕을 타고 내려왔다. 말을 쉬게 하지도 않고 평원을 달리고 온 모양이다.
“계속 달려서 갈 거니까 용건이 있으면 지금 말하도록.”
“우리 지금 전쟁통이야? 뭐가 그렇게 급해?”
오즈월드는 못 들은 척 먼저 출발하려는 듯 굴었다.
“검을 만들려면 시간이 넉넉히 필요해.”
“나 새 검 주는구나! 근데 본데일이란 이름은 제련으로 들어본 적 없는데.”
“유명하지 않으니까 들어본 적 없겠지. 최근에 주인이 바뀌었다고 하더군.”
그 얘길 들으니 본데일이라는 지명이 생각났다. 써드빌과 멀지 않은 곳에 주인 없이 노는 땅이 있었는데, 이번 전쟁이 끝난 후로 드디어 새 나으리를 만났다고 한다. 별개로 왜 그곳에서 검을 만들겠다는 건지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오즈월드는 기다리지 않고 말을 몰았다.
이 왕국이 권력 싸움으로 얼마나 어떻게 복잡했는지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고, 유리창이나 접시나 좀 깨지고 말 여느 집구석 싸움이 아니라, 사람들이 얼마나 휘둘렸는지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산 증인으로 오즈월드가 아주 적당한 사람이었다. 지금이야 햇빛에 그을린 피부에, 꿀처럼 진한 금발까지 웬만해선 호불호가 있기 어려운 얼굴로 셀링되고 있지만, 십년 정도 과거라고 해도 거울이 없을 만큼 미개했던 건 아니라 그때의 본인이 어땠는지는 온전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먼지에 뒤덮인 푸석푸석한 금발이 스트레스로 인해 손만 집어넣어도 한 움큼이 빠져나가는 걸 보며 심란한 얼굴로 전쟁터를 돌아다닌다. 거칠한 수염에 덮인 얼굴에 퀭한 눈빛을 하고는 할 일을 겨우겨우 떠올리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할 일이란 대체로, 누군가의 흠결을 탓하며 검을 휘두르는 일이다. 여기저기 손안의 장난감처럼 불려 다니는 데아 기사단이 점차 남쪽으로 내려와 도착한 곳이 본데일이다. 본데일의 귀족에게는 반역이라는 혐의가 있었다. 그전에 지나온 남쪽의 귀족들, 반역은 마치 소문보다 가볍게 전염됐다. 자리가 위태로운 왕이 눈 감고 휘두르는 검이 남쪽 지방을 난도질했다. 눈먼 검이 남쪽을 헤맨 지 벌써 두 달을 넘어섰다. 혐의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본데일에 모인 수많은 기사와 용병들에게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본데일의 성에는 왕권을 위협할 만한 수의 사병이 있었고 국지전이 될 게 뻔했다. 성의 일부를 무너뜨리고 용병이 합세한 인수로 물량 공세를 해 본데일의 귀족 나으리를 끌어내려 목을 베는 것은 여태껏 일어난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왕명이었고… 왕명이 펼쳐진 곳의 기사들은 전부 이 남자와 같은 얼굴이었다. 칼립소가 있다면 달라졌을까?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장소로 바꿔뒀을까? 그녀와 함께, 모든 걸 뒤로하고 도망쳐야 했을까? 심지어 본데일은 고향인 써드빌과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기선 소금 냄새도 눅눅한 바람도 느껴지지 않았다.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오즈월드는 그 생각을 하면 심장과 발이 이어지는 핏줄 어딘가의 뿌리가 시큰해지는 감각을 느낀다.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갑자기 큰 소란이 들려왔다. 오즈월드가 고개를 돌리자 저 지평선 끝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상태가 나쁘지 않은 용병들이다. 그나마 용병들이 고용되면 분위기가 무뎌졌다. 확실한 보상을 받고, 확실한 모험을 건 이들은 유령처럼 걸어 다니는 데아 기사단의 죽상을 어느 정도 묻어두는 쾌활함이 있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한 정예 기사단이 왕의 명령에 꼭두각시 인형이 됐다는 내용의 풍자극이면 용병단은 서커스단처럼 등장하는 희극 같았다. 오즈월드는 잠시 그들을 보다가 돌아섰다. 이가 다 나간 날의 검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용병이 도트라에서 내려오면서 식량을 조달해 왔을 테니 안심이었다. 검도 가져왔을까?